111년, 부산과 영화가 함께했던 시간

   
 

 

 

엄준석  영화평론가, '빛평' 편집장

 

   
 

부산좌(1907〜1923년)

[출처: 네이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63576&cid=4562&categoryId=4562]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 파리의 그랑 카페 지하에서 세계 최초의 영화가 탄생했다. 그리고 8년 뒤 한국에서도 최초의 영화가 상영됐다. 이는 1903년 6월 23일 자 황성신문에서 확인해 볼 수 있는 사실로, 동대문 전기 회사 기계 창고에서 입장료 10전을 받고 활동사진을 상영한다는 광고가 그것이다. 부산의 경우 그 당시의 서울보다는 늦게 영화가 도착했지만, 그럼에도 시기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었다. 세계 영화의 탄생 시점에서 그리 오래지 않아, 부산도 자족적인 영화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부산 영화는 1903년, 지금의 광복동에 있었던 행좌(幸座)’와 ‘송정좌’에서 등장했다. 이후 일본거류민들의 주거 및 상업 중심지였던 중구에 부귀좌(1905년. 1907년, 부산좌로 변경), 동양좌(1912), 변천좌(1912, 1916년 상생관으로 변경), 욱관(1912), 보래관(1914), 태평관(1922), 국제관(1920), 부산극장(1930) 등 14개에 이르는 극장이 들어섰다. 또 1924년 조선키네마주식회사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제작사 및 촬영소가 개설됐다. <운영전> <해의 비곡> <신의 장>이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만든 대표적인 영화들이었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 천재 나운규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대표적인 배우였다. 수도권이 아닌 지역-부산은 나름의 독립적인 영화 제작 환경을 구축했고, 이는 부산 영화 발전의 토대를 만드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했다. 부산 지역사 연구자 표용수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영화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면모를 일찍이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엄밀하게 부산 영화산업의 발전은 1948년 한국 정부가 들어서고, 1950대에 한국 전쟁이 진행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이후부터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발족했고, 전포동에 부산영화촬영소(1958년 설립)가 세워졌으며, 1955년 현대극장을 시작으로 국제극장, 제일극장 등의 대형영화관 시대가 열렸다. 1958년에는 부일영화상이 만들어졌으며, 1960년대에 들어서는 부산 개봉관을 중심으로 영화계 제작자본 형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같은 성과도 다만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부산 지역의 영화문화 토대 마련 및 그것의 발전은 부산 시민과 시가 주도하여 이루었기보다, 6ㆍ25전쟁을 말미암아 서울에서 피난 온 영화인들의 기획에 힘입어 형성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1970년대와 1980년대도 마찬가지였다. 부일영화상이 제16회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 것이 가장 상징적이었다. 1980년대는 수도권에 더 의존적이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본격적인 시장경제체제를 받아들여 그에 따른 체제변화를 전격 수용해야했다. 시대적 상황이 불러일으킨 문제와 갈등으로 부산 영화산업과 문화도 점차 쇠약해져 갔다. 1955년 12월 25일 현대극장 개관과 함께 진행된 대형 영화관 시대는 이때부터 쇠퇴했다.

주목할 만한 성과도 있었다. 1983년 3월 남구 대연동의 부산산업대학(경성대학교 전신)에 연극영화과가 개설됨으로써 지방대학으로서는 두 번째로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시작됐고, 1984년 장갑상 회장에 의해 부산영화평론가협회가 재건하기도 했다. 이 외에 두손코리아가 <서울 흐림 한때 비>(김송원, 1986년), 대경필름이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송영수, 1987년)을 만들었고, 이 영화는 제26회 대종상 각본상을 받는 등의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적은 영화 제작편수가 말해주듯, 수도권보다 열악하고 협소한 영화 제작 환경을 갖추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80년대까지 이어진 부산 영화 산업 및 문화의 성과는 상업영화의 체계적인 시스템이 아닌, 독립적인 자본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독립영화는 프랑스문화원, 부산가톨릭센터(현 아트씨어터 씨앤씨)와 같은 몇몇 대안 공간에서 상영됐다. 경성대학교를 비롯한 부산 내 대학의 영화학과 학생들은 직접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부산독립영화의 초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김옥심 감독의 <장독>(1986)은 발전된 문명을 상징하는 냉장고에 의해 과거의 문명 장독대가 사라지는 모습을 실험적인 영상으로 표현했다. 부산 독립영화는 그 등장부터 영화문화와 산업 그리고 텍스트를 이미지화하는 데 있어 다양성을 추구했다.

기존 상업영화는 부산이 가진 역사와 문화, 사람과 이야기 등, 부산성(Busaness)을 재현하는 데 문제적이었다. 이 영화들은 부산을 편협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년)과 같이 빈부격차가 심했던 부산을 남포동, 영도(다리), 송도 등 부산을 대표하는 공간을 통해 잘 보여주는 영화도 있었다. 하지만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년), <공포의 황금부두>(이혁수, 1971년)등과 같이 대부분의 영화가 부산을 퇴폐하고 범죄가 자주 일어나는 공간으로 묘사했다. <친구>(곽경택, 2001년), <범죄와의 전쟁>(윤종빈, 2012년), <도둑들>(최동훈, 2012년) 등 최근의 영화에서도 그 문제는 쉽게 해결되어 있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후자의 영화들은 부산에서 불법적인, 비합리적인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잘 보여준다. 또, 그런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부산민의 삶과 고통을 잘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범죄와의 전쟁> 속 ‘반달(깡패이기도 아니기도 한)’은 최익현(최민식 분)이 직장 내의 불합리와 가정의 빈곤에 맞서기 위해 택한 정체성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영화가 부산의 부정적인 면을 더 강조하고 극화하는데 몰두했기에, 부산(성)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부산을 왜곡되게 볼 수밖에 없게 하는 면모를 가진 것이다.

반면,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부산독립영화는 기존 상업 영화가 부산을 재현하는 문제를 극복하고 있다. 1997년 <내 안에 부는 바람>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영화를 제작한 전수일 감독은 사실주의와 표현주의를 넘나드는 독특한 자신만의 색깔을 보였다. 김희진 감독도 2000년 <범일동 블루스>를 통해 거리와 시장, 골목과 영화관 그리고 그 주변을 서성이는 인물을 포착했다.

   

영화, <도다리-리덕스>의 한 장면

   

영화, <범일동 블루스>의 한 장면

 2000년대에 들어서는 더욱 많은 영화인들이 부산을 재현하는 데 있어 주목할 만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 중 몇몇 영화만 추리자면, 박준범 감독의 <도다리-리덕스>(2011년), 김지곤 감독의 <할매1~2>(2011~2년), 오민욱 감독의 <상>(2012년), <재>(2013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감독은 사실주의적인 극영화나 다큐멘터리, 또는 실험영화와 같은 다양한 양식으로 활발하게 부산과 부산 시민의 삶을 재현했다. 요즈음 들어서는 <변호인>(양우석, 2013)과 같은 상업영화도 부산을 더 밀도 있는 이미지와 서사로 재현하고 있다. 2013년을 기준으로 부산에서 만들어진 장편영화가 34편이나 된다는데, <변호인>을 기점으로 좀 더 성숙한 작품들이 많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또한 부산국제영화제가 해를 거듭하여 성장하고 있다는 점, 부산에서 새로운 시작을 알린 영화진흥위원회, 그리고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승격된 부산독립영화협회의 활동 또한 기대된다. 이들 단체의 발전은 부산 영화 문화와 산업에 유용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영화들이 부산이라는 장소를 대하는 심도 있는 접근과 더불어 영화의 제작을 뒷받침하는 건강한 문화와 산업이 있다면, 부산 영화 환경을 개선할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부산과 부산영화를 사랑하는 부산 시민과 함께 호흡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저작권자 © NBN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