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마음따라]

   

영천 은해사의 백흥암
   
      ▲ 강영미
      작가. 전 외국어고등학교 교사
 

 

 흐드러지게 핀 매화가 실바람에도 꽃잎을 하르르 하늘로 소지(燒紙) 올리는 이른 봄날에 불현듯 백흥암을 가고 싶었다. 백흥암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암자였다가, 300일간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과정을 다큐 형식으로 제작한 영화 <길 위에서>가 세상에 나오면서 그 배경으로 알려져 대중들의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아직도 백흥암은 엄격하다. 일 년 에 딱 두 번, 초파일과 백중절에만 산문을 대중들에게 열어준다.
 영천 은해사의 산내암자인 백흥암은 비구니 수행도량이다. 아마 국내의 비구니 암자로서는 유일하게 대중과의 소통을 단절한 채, 철저하게 수행하고 울력을 통해 자체적으로 먹거리를 조달하는 곳이지 싶다. 80년 초부터 이곳을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만든 육문스님은 살림이 빠듯해도 돈 되는 일은 하지 말며, 법당에 인등 달지 말고, 쌀을 제외한 채소류는 모두 길러 먹고, 무위도식은 용서하지 않는다. 등의 실천적 지침을 엄격하게 내리시고 본인이 몸소 먼저 실천하셨다.

 은해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길을 40분 정도 걸어 올라갔다. 제법 진달래가 화사한 빛을 더했고, 노란 꽃망울에 향기를 나눠주는 생강나무꽃도 눈과 코를 즐겁게 만들었다. 박새나 진박새의 경쾌한 노랫소리도 암자순례를 환영하는 축하의 메시지로 들린다. 엄격함에 비해 작은 암자라 그런지, 백흥암은 일주문이 따로 없다. 그저 벽을 출입문 하나 크기로 열어놓은 곳이 일주문겸 사천왕문겸 출입문이며, 그 앞에는 굳게 닫힌 보화루가 철옹성만큼이나 견고하게 버티고 서 있다. 산길 산책이었다고 생각하고 여기서 돌아가야 하나... 망설이며 목을 길게 빼어 공양간 안을 기웃거리는 순간, 내 앞으로 거짓말처럼 스님 한 분이 나타나셨는데, 놀랍게도 백흥암 선원장이신 영운스님이시다. 세상에 이런 행운이 있나~! 순간적으로 용기를 내어 스님께 간청을 드렸다. 부산에서 암자순례 왔는데, 운이 좋게도 <길 위에서>출연하신 영운스님을 만나 행운이며 감사하다고, 잠시 극락전에 참배만 하고 가면 안 되겠느냐고 조심스레 졸랐다. 스님은 잠시 먼 눈길을 하시더니 안에다 대고 누군가를 부르셔서 안내를 해주라고 하신다. 잠시 뒤 공양간 안쪽  방에서 복사꽃빛 뺨을 가진 어여쁜 비구니 스님이 열쇠꾸러미를 들고 나오셔서 공양간 옆의 공간을 따라 들어가 고색창연하게 우뚝 서 있는, 굳게 잠긴 극락전의 문을 열어주셨다. 스님이 문을 여시는 동안 극락전 사진을 얼른 한 장 찍었다. 극락전 내부의 사진은 절대 찍으면 안 된다는 다짐을 들으며 극락전 안으로 들어갔다.

 극락전은 인조 21년(1643년)지어져 몇 차례 수리를 거쳤지만, 기둥이나 퇴락한 단청의 모습은 거의 원래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건물로 보물 (790호)이다. 하지만 정작 더욱 중요한 보물은 극락전의 아미타 삼존불을 떠받치고 있는 수미단(보물 479호)이다. ‘수미단’이란 법당 정면에 상상의 산인 수미산 형태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불상을 모시는 대좌를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미단이 바로 여기 백흥암 극락전의 수미단이다. 정교한 목조각으로 앞단을 5단으로 각 단은 다시 5등분으로 나누어 새, 동물, 연꽃, 도깨비상, 등을 특색있게 배열하고 새겼는데 섬세함과 정교함,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색체의 신비함까지 갖춘 그야말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대좌로 불교 목공예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복사꽃빛 뺨의 스님은 귀찮은 표정보다는 살풋 웃는 어여쁜 표정으로 영산전은 열려 있으니 참배하고 싶으면 마저 하고 가라 하신다.

 세상과 단절된 백흥암의 뜨락은 정갈하다 못해 반짝이는 모습이었다. 내 살아오며 얼마나 많은 복덕을 쌓았기에 이런 행운을 누리는 것일까? 가슴에 가득 차오르는 환희심으로 봄햇살이 화려한 폭죽처럼 느껴졌다. 먼지 한 올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잘 쓸어놓은 뜨락 한 켠에 노란 수선화가 눈부시게 피어 있었다. 연보랏빛 제비꽃도 한창이고, 제철이 아닌 맥문동도 자루모양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커다란 저수지가 보이는 곳까지 내려오면, 좁은 산길로 올라가는 길목에<인종대왕태실>로 올라가는 푯말이 보인다. 조선의 12대 임금 인종의 태실을 명종 원년에 팔공산 자락에 모시게 되자 그 태실의 수호사찰로 백흥암을 정하고 중창불사를 했다. 임금의 태실을 만든 곳이니 팔공산 자락이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 싶다. 산길 800m를 다시 천천히 걸어서 봄날의 산길이 주는 생동감과 풋풋함을 만끽하며 올라갔다. 태실(胎室)이란 왕실의 왕자나 공주가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묻는 석실을 말하며, 일제강점기에 전국에 산재해있는 태실의 관리가 어렵다는 구실을 내 세워 경기도의 서삼릉으로 모두 옮겨 태실군을 만들었고, 지금 이 자리는 2007년에 보수 복원한 모습이다. 훤칠하게 키 크고 잘 생긴 소나무 군락이 태실을 옹위하듯 둘러싸고 있는 모습은 적막하면서도 비장하게 보였다. 튼실한 장졸들이 태실을 지키고 서 있는 모습 사이로, 울긋불긋 진달래의 색감은 봄날의 운치를 더했고 가끔 어여쁜 소리로 추임새 넣어주고 가는 새들은 적막감을 끊어서 푸근하고 따스한 봄의 온기를 전해주고 갔다.

잠시 태실 곁의 마른 풀 위에 앉아서 가방 안의 보온병을 꺼내 차를 한 잔 마시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행복’이란 감정은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은 찌르르한 전율 한 자락이 가슴 가운데를 훑으며 지나갔다.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 법, 곧 작은 빗방울들이 향기처럼 감겨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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