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미진 불문학박사, 부산대 출강

1983년 500원하던 것이 이제는 5000원이 되었다. 자장면 얘기다. 인플레이션과 꾸준한 물가상승 속에, 우리가 사는 모든 것의 가격이 올랐다. 세월을 거치면서 그 값어치가 수십 배, 수백 배나 오른 것이 어디 이뿐일까? 생뚱맞지만 아이돌 그룹의 한 여성 멤버의 다리는 몇 억의 값어치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한 유명 프로 스포츠 선수의 ‘몸값’은 수백억에 달한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미디어에 등장한 껄끄러운 단어인 ‘몸값’은 이른바 육체가 자본이 된 시대를 여실히 증명한다. 공공연히 회자되는 ‘몸’의 가치는 연예계나 스포츠 분야에 그치지 않는다. 외모가 경쟁력이라는 말에 외모지상주의라고 발끈하는 것조차 무안한 것이 우리 현실이다. 쌍꺼풀 수술이 대학 입학선물이 되고, 연휴 기간이면 성형외과가 특수를 누리는 일이 보통이 되어버렸다. 모난 성격은 참을 수 있어도 못난 얼굴은 참을 수 없다 한다.

문제는 얼굴에 이어 몸 전체로 가공할 자본화가 진행되고 있고 그와 아울러 비인간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몸에 대한 숭배는 동서양을 넘어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자신의 몸이 마치 기계라도 되는 듯 미용 성형을 ‘튜닝’이라 당당히 밝히는 일부 연예인들의 발언은 듣기가 불편하다. 더 큰 효율성을 위해 몸을 ‘개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단적으로 효율적이지 못한 몸을 가진 사람들의 삶은 행복할 수 없다.

그런데 과연 효율적인 몸이란 어떤 것인가? 살펴보면 결국 더 많은 돈과 관심, 그리고 사랑을 얻을 수 있는 몸이 효율적인 몸이다. 그를 위한 자발적인 ‘개량’ 노력은 자신을 남다른 ‘명품’으로 만들기 위한 당연한 과정으로 여겨진다. 분야를 막론하고 노동을 통해 벌 수 있는 돈으로 자신의 가치를 매기는 것이 당연하게 치부되는 사회에서 각각의 몸의 값어치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각각의 목숨 값은 어떠한가?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만 무수한 예가 각기 다르게 매겨진 우리의 목숨 값을 보여준다. 금세 떠오르는 멜라민 파동이나 광우병 파동만 보더라도 오로지 더 큰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의 안전이나 건강, 심지어 생명을 거는 미친 도박꾼들에게 생명의 가치란 그저 하잘 것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재(人災)라 불리는 각종 사건의 배경 역시 마찬가지다.

도대체 언제부터 생명의 가치가 이처럼 싸구려가 된 것일까? “질주하는 바퀴가 청개구리를 터뜨리고 달려갔다/……/나는 한 생명이 바퀴를 멈추는 데/아무런 제동도 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목격」)”는 반칠환 시인의 지적은 적확하다.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어야 브레이크 없이 파멸을 향해 내달리는 이 바퀴를 멈출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알지도 못한 채 어디론가 내달리고 있는 이 걸음을 멈추고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 맞는지 묻게 될까? 물론 생산성, 경쟁력, 효율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기계가 될 수도, 기계가 되어서도 안 된다. 산업혁명 후, 일자리를 기계에 빼앗긴 분노한 노동자들이 벌였던 기계파괴운동인 러다이트 운동이 무색하게 우리는 스스로 기계가 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는 그 어떠한 것도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심지어 양심조차도 말이다. “당신은,/봅슬레이를 타고 인생에 대해 반성하는 선수를 본 적이 있는가(「반성」)”라는 반칠환의 질문처럼 미친 속도로 질주하는 봅슬레이에서 내리지 않는 한 제대로 가기 위해 필요한 반성의 시간을 결코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자발적으로 돈의 노예가 된 우리 인간의 목숨 값은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 그런데 멈추어 생각해보면, 하늘 아래 단 하나뿐인 우리의 목숨에 값이라는 걸 매길 수 있기나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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