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인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
국립 부곡병원장

필자는 가끔씩 주위 사람들로부터 무슨 과 의사냐 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정신과의사라고 하면 대부분은 별로 도움 받을 일이 없다는 듯 실망한 표정을 짓는다. 내과라면 몰라도 정신과는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는 분야라고 생각한 듯이. 그러나 그런 사람들 가운데 나중에 필자의 도움을 받은 경우가 실제로는 적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평생 동안 한번은 정신질환에 걸릴 가능성이 30%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폭력은 정신건강의 중요한 위험 요인이다. 가정폭력, 학교폭력, 성폭력을 중대 사회악으로 규정하는 이유다. 이들 폭력과 관련된 기사가 하루걸러 언론의 사회면을 장식하는 게 요즘 우리 사회의 민낯이다. 거기에 덧붙여 자살률은 OECD 국가 가운데 최고다. 원래부터 자살률이 높았던 게 아니라 지난 이삼십 년 동안에 자살률이 급격하게 상승하였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더하다. 흔히 자살률을 그 사회의 병리를 가늠하는 바로미터라고 한다. 이렇듯 심각한 사회 문제들이 우리들의 정신건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직시한다면, 정신과를 기피하거나 사시적으로 보는 태도는 부메랑이 되어 고스란히 사회적 부담으로 되돌아온다.

4월 4일은 ‘정신건강의 날’이다. ‘정신건강의 날’을 별도로 지정한다는 것은 그만큼 정신건강이 우리의 삶의 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중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정신건강의 날’을 4월 4일로 지정했을까? 숫자 4는 편견을 내포한 상징적 숫자라는 점이 고려되었다고 한다. 즉, 4는 죽음을 의미하는 사(死)를 연상해서 불길한 숫자로 인식됨으로, 숫자 4에 대한 편견처럼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없애자는 뜻에서 4월 4일을 ‘정신건강의 날’로 지정했다는 것이다.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이나 낙인은 그들로 하여금 치료를 기피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사회생활도 어렵게 한다. 따라서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과 낙인 해소는 치료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적응을 돕는데도 매우 중요하다. 정신의학계나 보건 당국에서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이나 오해를 해소하기 위한 사회적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 이유다. ‘정신건강의 날’ 제정도 그 운동의 일환이다. 그러나 정작 많은 정신병원들의 시설은 오히려 편견과 오해로 점철되어 있다. 병동의 창문들은 쇠창살로 가로막혀 마치 새장과 흡사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종합병원에서도 정신병동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창살 있는 병동을 찾으면 되기 때문이다.

약 2세기 전 1793년 어느 날, 프랑스 파리의 비세뜨르병원장 삐넬은 “정신질환자들은 가두고 고문해야 하는 야수가 아니라 품위 있게 대해야 할 사람들이고, 우리는 그들을 존중해줘야 한다.”면서 환자들을 옥죄고 있던 쇠사슬을 풀어주라고 지시한다. 정신병원이 정적들을 감금하는 장소로 이용되던 프랑스 혁명기 감옥의 감독관은 “이 야수들을 풀어주라니 당신이 미친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자 삐넬은 “나는 이 사람들이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다면 치료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라고 답한다. 정신질환자들은 그렇게 해서 쇠사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정신의학의 제1차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 혁명의 뒤에는 쇠사슬에서 해방된 정신질환자가 사고를 낼 경우, 스스로 단두대에 서겠다고 하는 삐넬의 목숨을 건 서약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삐넬 사후 2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의 많은 정신병원들은 쇠창살로 상징화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OECD국가라는 점에서 이는 국격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후진적인 현상이다. 정신질환에 대한 무지나 오해가 편견과 낙인의 주범이라면, 쇠창살로 세상과 단절된 정신병원의 모습은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과 낙인의 종범이다. 며칠 전에도 모 정신병원에서 알코올의존 환자가 쇠톱으로 창살을 자른 후, 침대보로 만든 밧줄로 탈출을 시도하다 추락해 숨졌다는 암울한 소식이 전해졌다. 치료가 아니라 탈출의 대상이 되는 정신병원의 모습에서 씁쓰레함이 느껴진다. 정신병원의 운영자나 종사자들의 용기와 결단이 정말 필요한 시점이다.

언젠가 삶의 의욕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던 한 판사가 있었다. 그는 정신질환자라는 낙인이 두려워 치료를 기피하고 혼자서 고민하다 결국 자살을 기도했다. 다행히도 자살은 미수에 그쳤고, 그는 최후의 심정으로 정신과의사를 찾았다. 자신의 고통이 우울증이라는 뇌기능장애에서 기인했음을 이해한 그는 적극적인 치료를 통해 의외로 쉽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과 병력을 약점으로 여기고 낙인찍힐까봐 감추려 한다. 그러나 그 판사는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과 낙인 해소라는 공익을 위해 스스로 자신의 병력을 언론을 통해 공개하였다. 필자에게는 그의 용기에 감동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정신건강의 날’이 있는 4월의 마지막 즈음, 편견과 낙인에 용기로 맞섰던 그 판사가 유난히 생각나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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