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작 - 아버지의 이메일

   
 
   
 

좌절된 떠남과 정착의 꿈.

올해 한국영화의 경향이 바뀌고 있다. 거대한 자본을 들인 블록버스터나 사극이 여전히 제작되고 있지만, 그 와중에서 <잉투기>,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한공주>, <셔틀콕>과 같은 독립영화들이 관객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간헐적으로 <똥파리>, <파수꾼>, <무산일기>가 좋은 평가를 받고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작년에 개봉한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로부터 시작된 독립영화의 기세가 이제는 제법 매섭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극장에서 상영 중인 독립영화 중에서도 홍재희 감독의 <아버지의 이메일>은 유일한 다큐멘터리이자 가족의 관계를 중심에 놓고 한국의 현대사와 가족의 감정을 함께 관찰하고 기록한다는 점에 눈길이 간다.

인민군이 싫어서 목숨을 걸고 고향인 황해도를 떠나온 아버지의 삶은 그 순간부터 시작된 가족과의 이별과 한 곳에 머물러 집을 이루지 못하는 방랑으로 점철된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었으나 계모의 방해로 좌절되고, 베트남 전쟁 당시 그곳에서 돈을 벌었지만 전쟁이 끝나가면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오일머니를 벌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 제법 돈을 모았지만 아버지의 일은 여기서 끝을 맺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아버지의 돈과 집에 대한 집착은 알코올 의존증으로 쉽게 옮아갔고 평생 술과 더불어 가족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런 아버지가 세상을 뜨기 얼마 전에 써내려간 43통의 편지에서 자신이 직접 겪은 체험과 과오, 회한에 찬 평생을 기록하고 용서를 구한다.

감독이 1인칭 시점에서 바라본 이 가족의 단절과 분열은 현대사의 질곡을 그대로 떠안고 있다. 혼자 월남한 것에 대한 죄책감, 어머니와 형제자매를 마지막으로 본 그 순간의 탄식. 계모에게 당한 학대와 아들을 지켜주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불신은 평생 아버지가 기댈 곳은 가족이 아니라 돈이라는 생각으로 기울어갔고, 이 나라를 떠나 더 넓은 곳에서 꿈을 펼치고 싶었던 이민의 꿈을 통해 지속된다. 하지만 아버지는 연좌제에 희생되어 번번이 실패하고 스스로 집 안에 유폐시킨 시간 동안 술에게만 곁을 허용했다. 그 결과는 가족과 친구와의 단절, 나아가 세상과의 단절로 이어지게 된다. 감독은 그런 가족이 싫어 집을 떠났고, 언니는 아버지가 이루지 못했던 미국행을 선택해서 완전히 이주함으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잊으려고 했다. 직장생활을 하는 남동생은 삶에 대한 모델이 되지 못했던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의 삶에서 어른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음을 고백하면서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그런 아버지의 곁을 떠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시대를 살아간 엄마의 말은 가족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가장 친밀할 수도 있지만 그렇기에 가장 심한 갈등에 휩싸이게 되고 좀처럼 해결방안을 찾을 수 없는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다. 여기에서 그친다면 여느 가족드라마와 다를 바 없겠지만 감독은 알코올 중독, 자신에게나 가족에게 폭력을 휘둘렀던 아버지의 삶을 가감 없이 바라보려고 애쓴다. 또한 한국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아버지 세대가 지나온 궤적을 통해 한국의 부끄러운 현대사 또한 대면하려고 한다. 이념간의 대립이 동서간의 지역적인 대립으로 이어지고, 아프고 부끄러운 역사를 받아들이고 화해하려는 시도보다는 단절되고 분리된 지금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도록 만든다. 6.25라는 민족의 비극을 겪은 아버지가 베트남전을 통해 돈을 벌어들인 사실이나 평생 빨갱이와의 대립을 통해 아내와 딸에게마저 방어적으로 대했던 사실, 가치관의 대립과 세대 간의 갈등, 평생 고향집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했겠지만 실제로 가족에게는 머물러 있지 않고 늘 도피했다는 사실을 지켜보는 감독의 시선이 오히려 담담하고 처연해서 숙연해진다. 감독은 아버지가 겪은 전후 혼란, 성장의 6,70년대, 88 올림픽으로 대표되는 국가적인 행사, 재개발의 광풍,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은 이념 논쟁이 현재 대한민국의 무수한 가족에게 공통된 기반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자기반성, 타인과 화해하는 방법론에 대한 고민 없이 개인, 가족, 역사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박인호 영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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