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문턱에서]

   

김은경
경성대 초빙교수

앞만 보고 달렸다. 어쨌든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며 온 국민이 열심히 달렸다. 그러니 내 주위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정치권과 기업이 저지른 비리, 편법, 인권유린도 잘 살아보자는 구호 아래 용인되어버렸다. 사람은 뒷전이고 한 푼 돈벌이가 더 중요했다. ‘돈보다 사람이 먼저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하면 ‘아직은 아니다’고 했다. 그러다 참담한 일이 벌어졌다.

세월호 참사. 이일은 당연히 인재다.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목숨이었다. 세월호가 점점 바다 밑으로 꺼져가고 있는데 그 안에 수백 명의 목숨이 살아 있는데 우리는 두 눈 뻔히 뜨고 안타까운 목숨들을 구해내지 못 했다. 세월호 안에는 아직 피워보지도 못한 열여덟 꽃 봉우리들이 수학여행을 가는 길이었다. 이제 막 교사의 꿈을 이루어 제자들과 함께 즐거운 여행길에 오른 선생님, 초등학교 동창들과 여행길에 오른 황혼의 친구들, 제주도에서 감귤농사를 지으며 살아보겠다고 어린 자녀들과 부푼 꿈을 안고 서울을 떠나온 가족, 사연은 수도 없이 많다. 그 많은 사연들을 남겨둔 채 그들은 차가운 바다 밑으로 가버렸다.

그렇다면 누가 이 귀한 목숨들을 수장시켜버렸는가?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우리 사회 곳곳을 돌아보니 부실투성이었다. 사람의 목숨보다 돈벌이가 우선인 사주가 있었고,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책임감도 찾아볼 수 없는 박봉의 비정규직 선장이 있었다. 언론은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정부에서 불러주는 데로 보도하기에 급급했고, 개인의 아픔은 아랑곳없이 취재 경쟁에만 열을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안위가 우선인 공무원 사회가 버티고 있었고 “청와대는 재난 컨트롤 타워가 아니다.”라는 지시만 내리면 다 되는 줄 아는 무능한 정부가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귀하디귀한 목숨은 외면당하고, 실종자 가족의 절규는 비통함을 넘어 온 나라를 집단 우울증에 빠지게 만들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책임질 줄 모르는 이 사회가 그들을 수장시킨 것이다. 앞만 보고 달리는 우리 어른들이 그들을 수장시킨 것이다.

불과 두 달 전 마우나 리조트 참사가 있었다. 그때도 어린 생명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두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가슴 아파했던가? 그리고 정부 관료를 비롯해 정치인들이 장례식장을 찾아와 대책을 마련하겠노라 약속했지만 그 후 제대로 된 대책이 마련되었던가? 단지 그때의 비난과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다시는 이런 불행한 일이 없도록 힘쓰겠다고 했던 것인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목숨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 이런 참사가 끝날 수 있을지 하루하루가 불안한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번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국민은 정부의 무능함과 무책임 앞에 깊은 분노와 불신을 느끼고 있다. 정홍원 총리가 사퇴하고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처벌하는 것으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차가운 바닷속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이들을 다시 뭍으로 끄집어내야 한다. 99%의 절망 속에서 단 1%의 희망만 있더라도, 우리는 그 희망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식을 손자를 오빠를 어머니를 기다리다 넋이 나간 가족들의 마음을 보듬어 줘야 한다. 적어도 국가는 이래야 한다.

혹자는 냄비근성이라는 말을 한다. 어떤 사건이 터지면 한때 분노하며 우르르 일어났다가 금세 식어버리고 잊어버리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뉴스에서 사라진다고 이 통탄할 사건을 곧바로 잊어서는 안된다.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총채적 부실을 정부가 확실히 개조할 의지를 갖고 임하는지 우리 국민은 철저히 따지고 감시해야 한다. 냄비 근성이 아닌 가마솥 근성으로 이런 참담한 인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다 함께 고쳐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제 달리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깊은 자성과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세월호 참사로 안타까운 죽음을 당한 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저작권자 © NBN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