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을 만나다] - (4) 홍법사 주지 심산스님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부산 금정구 두구동에 위치한 홍법사를 방문하였다. 경내 농장에는 수많은 수목과 화초들이 형형색색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곳 주지이신 심산스님은 부처님오신날 행사로 인하여 바쁘신 와중에도 시간을 내셔서 좋은 말씀을 들려 주셨다.

일시: 2014년 5월 1일
장소:홍법사 내 접견실
본사참석자- 주 덕(문화레저팀장)
배병수(사진팀장)
장윤원(문화레저팀 기자)
정리-장윤원 기자

-  절이 굉장히 넓습니다.

심산스님 : 이곳은 원래 하도명화 보살님께서 평생 나무를 키우던 농장이었죠. 12년 전 제가 온 후 더 이상 나무를 안 심고 팔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얻은 공간에 건물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보시다 시피 평지라서 젊은 부부들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많이 찾아옵니다. 연로하시거나 몸이 불편하신 분들도 왕래하시기가 편리하게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 신도가 많겠습니다.

심산스님: 부처님 오신 날에 수 많은 사람들이 다녀갈 것으로 예상합니다.

-  부처님 오신 날이 우리 인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심산스님 :원래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탄생하시자마자 동서남북을 일곱 발자국 걸으시고, 오른 손으로 하늘을 왼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완전히 자유로운 자이며, 삼계가 다 고통 속에 있으니 내가 마땅히 그들을 편안하게 하리라.”라는 뜻입니다. 요즘 세월호 사건 때문에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생각들이 더 절실하지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씀도 부처님 혼자만 잘나셨다는 뜻이 아니고 모든 각자의 생명이 다 소중하단 말씀입니다. 그러면 소중한 존재가 왜 여기 왔는가? 온 세상(삼계)이 다 고통 속에 있고 누구나 마음 속에 고뇌와 고통을 갖고 있습니다. 부처님 오신 뜻은 이 모든 괴로움과 불편함을 해결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모든 이가 다 부처라고 하셨어요. 모든 존재는 소중하고 귀한데 그 존재가 이 세상에 온 뜻은 주변의 고통 받는 이들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란 말씀입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소중함, 내가 이 사회에서 해야 할 역할에 대한 살핌, 이것이 이뤄져야 부처님 오신 날을 제대로 맞이하는 불자라 할 수 있죠.

- 현실적으로 힘든 일입니다.

심산스님: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방법이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는 업생, 즉 업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력생, 원력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업생이란 자기가 지은 결과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더 좋은 일을 했다면 인간의 몸으로 나지 않고 극락으로 바로 갈 수도 있거든요. 우리는 업 때문에 인간 세상에 온 것입니다. 원력생은 인간 몸을 받았다 하더라도 업으로 떠밀려 온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해서 온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본인이 업생인가 원력생인가 질문을 받으면 업생이라고 겸손하게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원력에 따라 세상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태어났다는 의미를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태어났다는 의미를 되새겨야함
내 안에서 내 삶을 콘트롤 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깨달아야 함

- 진정한 불자란 그런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을 말하겠군요. 그러면 불교 신앙의 단계를 어떻게 분류할 수 있습니까?

심산스님: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의 3 단계로 분류합니다. 상근기의 사람은 내가 부처라는 사실을 믿으며 살지요. 중근기의 사람은 자신은 부처가 아니라 생각하고 부처님을 위대하다고 생각하고 믿는 사람입니다. 하근기의 사람은 부처님이든 뭐든 좋다 하면 다 믿는 사람들입니다. 신행이 무엇인지 몰라서 이것저것 다 해보는 하근기의 삶으로는 부족하고 부처님을 믿는 중근기 까지는 가야합니다. 내가 부처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깨달음이 있는 상근기의 삶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신행의 단계를 보면, 처음에는 산에도 절을 하고 보편적인 선을 추구합니다. 여기서 한 단계 발전된 것이 부처님을 믿는 것이고, 공부를 계속하다 보면 누가 있어 내 삶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서 내 삶을 콘트롤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 경지에 이르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부처님이십니다. 경전 중 상근기의 경에 해당하는 법화경은 요지가 회삼귀일입니다. 셋을 돌이켜 하나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셋이란 보살, 성문, 연각을 말합니다. 보살은 사람들이 삶 가운데 가장 모범 또는 모델되는 삶이고 성문은 가르침을 듣고 깨우친 사람이며 연각은 부처님 공부를 해나가는 단계입니다. 소승 불교에서는 보살만 돼도 부처라 생각합니다. 이 셋을 돌이켜 하나로 가야하는데 그것이 바로 부처입니다. 모든 존재가 부처님처럼 살도록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 교황청에서 얼마 전에 수덕사를 방문했더라고요. 타 종교와의 교류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십니까?

심산스님 : 불교는 타종교를 배척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마음 속에 자기 진실, 내가 부처구나 할 때의 그 부처는 헛된 삶을 살지 않습니다. 내면의 진실성 구현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불교는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힘이 자기 안에 다 있다고 가르칩니다. 불성 즉 부처님의 성품이 내 안에 있습니다. 반면, 기독교는 선을 성취할 힘을 내 안이 아니고 하느님에 의지해서 찾습니다. 그 분의 힘을 통해서 구하는 것이 기독교의 방식이죠. 내 안에 있다 생각하고 자기를 끊임없이 돌아보고 성찰하면서 바로 살 수 있다고 끊임없이 되새기면서 사는 것이 불교라면, 그 힘을 신에서, 그리고 대리인인 예수님을 통해서 찾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특정한 종교가 최고라고 주장하기 보다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 열려있는 세상에서는 다양성 속에서 서로를 인정하는 것이 평화에 기여하지 않을까요. 부처님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부처님이 추구하는 세상은 부처님이 필요 없는 세상이라고요. 다양성 속에서 서로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

- 홍법사는 봉사와 구제활동을 많이 하는 사찰로 알려져 있습니다. 종교 단체들이 힘없는 자들의 구제에 많이 애쓰고 있는데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심산스님: 인간의 고통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물질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이 있고 그에 따라 물질적 해결과 정신적 해결이 있습니다. 물질적 해결은 하근기적인 방법이고 정신적 해결이 더 바람직한 해결법이라 하겠습니다. 종교의 역할이 정신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지만 생존과 관련 있다면 물질적 해결부터 해 줘야합니다.

- 우리나라가 선진화 되면서 복지에 대한 지원이 많이 늘었지만 다른 선진국에 비해 복지 예산 비율이 적습니다. 종교계가 어려운 사람들과 더 가까워져야한다고 생각하는데 당장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부터 먼저 줘야 마음의 소리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요?

심산스님 :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 하다고 했습니다. 물질적 구제 분야에서 종교적 역할이 크지 않다는 말입니다. 고기를 잡아서 먹여 주는 것 보다 낚시 하는 방법을 가르쳐 줘야한다는 논리를 가지고 끝까지 사람들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을 주는 게 종교입니다.

당장의 배고픔을 달래 줘야 한다는 점에선 동의합니다. 현재 복지관이라 이름 붙은 곳은 대부분 종교계가 담당하고 있고 사회복지 법인을 통해 고아원, 실버타운 등을 운영하고 있는 종교 단체도 많습니다. 복지를 통한 자선 활동에 불투명한 부분들이 다소 있어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절대 빈곤자들에겐 분명 힘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을 주는 것이 종교

- 한국이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물질과 정신 사이의 괴리도 큽니다. 한국의 정신적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종교가 아닐까 싶은데요. 종교계에 대한 불만과 비난도 더러 있지만 사회적 균형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산스님 :풍요로움을 누리기 이전 복지사업들이 불투명한 부분이 있어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이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 역할과 기여도에 대해 인정은 하지만 투명성은 확보해 가야할 숙제라고 봅니다.

- 좀 건방진 질문인데 스님께서는 행복하십니까?

심산스님: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면 욕먹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회사람 기준으로 봐서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거든요. 스님들은 우선,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개인적인 고뇌가 없습니다. 공동체 안에 있으니까요.

- 성직자에게 부과된 의무, 신도들과의 교류나 소통도 힘들 수 있고요. 저 같으면 절대 못 할 것 같습니다.

심산스님 : 업이 다 다르니까요. 저 같은 경우 사회에 나가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자기 업이란 것이 있는데 스님들은 행복하죠, 행복하지 않으면 안 해야죠. 행복이란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 의무, 짐을 져야합니다. 짐을 안지고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스님이 되면 안 되죠.. 자기가 해야 할 역할을 안 하고 누릴 것만 구하는 것은 탐욕입니다. 세월호의 선주 같은 사람은 누릴 것은 다 누리면서 안전 관리와 같은 의무를 다하지 않아서 문제가 된 것 아닙니까?

- 남들이 다 자는 새벽에 일어나야하고 신도들 고민도 들어줘야하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 술 한 잔으로 풀 수도 없는 것이고요. 성직자로서, 리더로서의 의무나 책임이 어깨를 누르진 않습니까?

심산스님: 엄마가 아이를 키우잖아요. 얼마나 귀찮은 일이 많습니까? 엄마는 그게 행복하잖아요.
새벽에 일어나고 신도들 고민만 좀 들어주면 되는 거죠 뭐. 그것 때문에 누리는 것도 얼마나 많은데요. 그 덕에 대접도 잘 받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해야 할 의무 보다 누리는 것이 훨씬 많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 우리나라 신앙인들이 성직자를 점장이 찾듯이 하는 면도 있지 않습니까?

심산스님 :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답을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거울입니다. 그냥 대해주기만 하면 거울에 비춰보면서 스스로 답을 찾아갑니다. 실제 삶속에서 보면 답 안 나오는 질문 가져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애달픈 마음을 알아만 줘도, 들어만 줘도 반 이상은 해결 하고 갑니다. 해결을 완전히 못 하지만 당사자는 충분히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엄마는 아침마다 도시락 싸야 하고 빨래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엄마는 의무 밖에 없는 사람이기도 한데 너무 행복하잖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출가해서 종교인이 된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출가 했는데 절의 노보살님들이 출가 참 잘 했다고, 출가해서 열심히 살면 대통령도 안 부럽다 하시더라고요. 모든 것을 이루고 다 가진 사람이란 의미에서 대통령이란 비유를 썼겠죠. 사회에서는 저처럼 50대가 되면 역할을 주지 않는 반면 스님들은 적어도 50은 되어야 대접을 좀 받습니다. (웃음) 장판 때가 묻어야 스님으로서의 연륜을 인정하기 시작하죠. 스님들은 정년이 따로 없습니다. 건강이 정년입니다, 내 힘으로 일어나 앉을 수만 있으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나이가 많아질수록 부르는 곳이 많아집니다.

- 그렇지만 아프시기라도 하면... 속세 사람들은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아프면 챙겨줄 가족이 있지 않습니까.

심산스님 : 불가에 들어와 10년이 지나면 상자(제자)를 받습니다. 사회에서 말하는 아들에 해당합니다. 법으로 맺어진 아들이죠. 한 스님 아래 제자들이 여럿 있습니다. 말썽피우는 제자도 있지만 효상자들도 있어 잘 모십니다. 상자가 다시 상자를 보면 손상자가 되고 이게 바로 문중이고 이 문중들이 비대해지면서 종단에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 문중에서 주지가 나와야 된다든지 우리 문중이 뭘 해야 한다던지 주장하기 때문이죠. 어쨌든 상자와는 사회의 자식 못지 않은 돈독한 관계를 갖고 삽니다.

- 편찮으셔도 큰 문제가 없겠습니다.

심산스님 :그렇죠. 각자 하는 것 만큼 대접도 받고 존경도 받는 겁니다. 내 즐거움을 다 찾으면 내가 (힘들거나 참음으로써 장차) 누릴 즐거움을 못 찾는 겁니다. 세상은 너무 공평합니다. 내가 할 의무로서의 고뇌를 외면하고 달콤함만 추구한다면 신장(보호해 주는 신)이 간섭하십니다. 절의 대웅전을 보면 상단 중단 하단이 있습니다. 중단에 104위의 옹호신들이 있고 반야심경을 그분들께 독송을 하지요. 그 분들은 선한 기운은 보호를 하시지만 악한 기운은 치십니다. ‘신장님이 나를 쳤다’는 표현을 씁니다. 절 내에서 선과 악에 대한 결과는 분명합니다. ‘선인선과 악인악과’ 선한 원인은 선한 결과를 악한 원인은 악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 누가 옆에서 해 주는 게 아니고 자연법칙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세계 평화를 논하려면 어떤 가르침을 펴야합니까?” 대답은 “인과법을 가르쳐라!”입니다. 이 하나만 알아도 세계 평화가 가능할 겁니다. 나쁜 일을 해 놓고 좋은 결과를 바라는 것은 중생의 욕심일 뿐이지요. 나쁜 일을 해 놓고 좋은 결과를 바라는 것은 중생의 욕심일 뿐

-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땅덩어리가 좁아서인지 참 사는 게 힘든 것 같습니다.

스님: 지난 1월에 미국에 다녀왔습니다. 가는 곳 마다 땅도 넓고 농사짓는 밭들도 끝이 안 보이더라고요. 그런 나라에 비하면 한국의 땅은 미로와 같습니다. 미로는 위에서 내려 보면 길이 보이지만 미로 속에 들어가면 길이 안 보이지 않습니까. 끝없는 자기성찰을 통해서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못 하면 그냥 미로에 갇혀있게 되는 겁니다. 땅 넓고 잘 사는 나라와 비교해서 불평하지 말고 여기 살면 여기에 적응을 해야죠.

몽골에 간 적이 있습니다. 볼 것 하나 없고 가진 것 하나 없어도 참 행복해 보이더라고요. 인상적이었어요. 여행을 좀 많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선진국 여행은 많이들 다녔으니 못 사는 나라나 오지 같은 곳으로 여행을 많이 하면 좋겠습니다. 갇혀있던 것들을 풀고 돌아와서 다시 막힌 이 곳에서 살고 이런 여행을 반복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콘트롤할 수 있는 힘이 길러집니다. 몸이 여행을 떠날 사정이 안 되면 참선을 통해 자유롭게 여행을 하면 됩니다. 명상이란 말을 쓰기도 하죠. 몸이 따라다니는 여행도 중요하지만 정신 세계 안에서, 정신 세계를 찾아다니는 여행도 참 좋습니다. 모든 세계가 이 안에 다 있으니 그 자유로움을 내 스스로 느끼지 못 한다면 바깥에서도 구하지 못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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