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표
 건축사사무소 아체 ANP 대표
 동명대학교 건축학과 외래교수
 

“공주야 왜 그렇게 수영을 열심히 해?” “다시 시작해보고 싶을까봐! 내 마음이 바뀔 수도 있으니깐.” 잔잔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이수진 감독의 <한공주>중의 대사이다. 꿈이 뭐냐는 친구의 물음에 “풀장 완주.”라고 ‘한공주’(천우희)가 대답했다. “엥? 25미터?” 어이없어하는 친구에게 말을 잇는 그녀는 “딱 25미터. 고만큼만 가보고 싶어. 진짜로.”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연습하는 그녀는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매일 악착같이 연습한다. 수영은 사건의 기억과 왜곡된 시선의 고통 속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그녀에겐 유일한 피난처이자 안전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집단 성폭행이라는 크나큰 상처를 입은 여고생 ‘한공주’는 피해자이지만 “저는 잘못 한 게 없는 데요”라는 말과 함께 사회와 학교의 ‘이기적 시선’을 피해 전학을 간다. 사회로부터 이탈된 아버지와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난 엄마로 부터 보살핌 받지 못하는 ‘공주’는 선생님의 배려로 선생님의 어머니 집에 기거하며 새 학교와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다. 상처의 고통과 분노로부터 치유를 바라는 그녀는 수영과 노래, 아르바이트 등을 통하여 아픔의 치유와 회복을 위한 노력을 하게 된다. 다신 웃음을 찾지 못할 것만 같았던 그녀는 도망가듯 전학 간 학교에서 새로운 친구 ‘은희’(정인선)를 만난다. ‘은희’로 인해 다시 노래를 부르며 그녀는 조금씩 웃음과 희망을 되찾아가지만 자신의 잘못도 아니고, 더구나 피해자일 뿐인데 사회로부터 차가운 시선을 피해 살아야 하는 그녀의 지난날의 사건은 문득문득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며 그녀의 고통을 치명적으로 되새긴다. 여고생의 치명적 고통과 대조를 이루는 어른들의 비열함과 치졸함이 그녀의 상처를 더욱 아프게 만든다.

영화는 그녀에게 사건이 가져다 준 상처와 기억 그리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일일이 묘사하거나 인과 관계를 설명하지 않고, 세심한 미장센과 연출력으로 파편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픈 기억은 불쑥 불쑥 떠올라 그녀의 일상을 방해하고 사회의 단편적 관심과 이기적 태도는 그녀의 주위를 겉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의 집단적 이기심이 그녀를 고통으로 옥죄어 올 때 “아빠 나 어떻게?” “뭘 어떻게! 아빠가 다 처리했으니깐. 걱정하지 말고 있어!” 그리고 “저 어떻게 해요? 선생님.” “지금 신문이랑, 방송에 다 나간 상태라서...”, “무서워요 선생님”, “전화하께...” 그 후 그녀가 힘겹게 잡고 있던 문자와 통화까지 친구로부터 외면 받았을 때 그녀를 휩쓴 외로움과 고통은 어떠했을까?

‘25미터 수영장 완주’가 그녀의 꿈이었고 ‘노래’가 그녀가 받은 친구의 유일한 손길이었지만, 부모와 학교와 친구와 선생님 모두 그녀의 손을 아무도 잡아 주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 중 하나인 “가만히 있으라”라는 어른들의 무책임한 한마디가 “한공주”에 와 닿아 있는 건 “어른”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기 때문이고, 사회적 시스템의 결함 또는 부재 일 것이다. ‘어른’의 사전적 의미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다. 자기 일에 책임을 질수 있는 ‘어른’의 부재는 한공주에게 25미터 수영장 완주 후에도 “공주야. 가봤자… 벽이야, 벽.”라는 사회 시스템의 부재로 연결되며, “가만히 있으라”라는 지시는 책임이 존재하여야 했건만 책임은 존재하지 않았고, 시스템은 결함과 오동작을 일으켰고, 지시를 믿고 따른 수많은 학생과 일반인의 생명을 앗아갔다. 우리 사회에서 ‘어른’은 권위적 위상에서 존재 하였든 건 아닌지? “따르라” “지켜라”라고 외칠 뿐, 책임을 질수 있는 어른은 얼마나 존재하는지?

한공주에게 “다시 시작해보고 싶을까봐. 내 마음이 바뀔 수도 있으니깐.”는 치유의 기회이자희망의 끈이었다. 그녀에게 수영은 그녀의 고통에 대한 탈출구이자 생명의 마지막 끈 이였다. 그 끈을 잡아 줄 수 있는 어른은 없었고, 사회적 시스템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우리는 4월 16일을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 만약 한사람이라도 탈출하라고 소리를 질렀다면, 구조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신속하게 작동하였다면.....그러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어른들의 타인에 대한 배려는 부재 했었고, 시스템의 결함과 오작동은 너무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갔고 우리에게 분노로 와 닿았다. 고귀한 아들, 딸들을 잃은 유가족들은 고통과 분노의 감정에서 헤어 나오는 시간은 무척 길 것이고 어떤 이는 끝내 고통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할 것이다. 조금이나마 그 고통의 치유와 분노로 부터의 회복은 사고 원인의 정확한 진단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이마저 놓친다면 유가족을 비롯한 우리 모두에게 크나큰 상처로 남아 결코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될 것이다. 나는 어른이기에 목숨을 잃거나 실종된 학생들에게 미안하고, ‘한공주’에게 미안하다. 치유와 용서도 사람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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