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석의 아름다운 이야기]

   

 김해석 원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의학박사
 아름병원장
 

요즘같이 날이 풀려가고 벚꽃 잎이 다 떨어져 갈 때쯤이면 생각나는 한 분이 있다. 그때도 이렇게 벚꽃이 질 무렵이었다.

그 분은 오랜 병원생활을 접고 멀리 필리핀에서 사업하는 분과 선을 보고 만나 결혼하여 필리핀에서 살고 계셨다.

결혼 후 바로 임신을 하였으나 3번이나 자연유산을 격고 몸과 마음의 상처받아 휴식을 취하러 친정이 있는 모국에 잠시 돌아왔다.

상처는 있었지만 그래도 아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기에 물어물어 지인들의 소개를 받고 나를 찾아오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렇게 그 분의 병력과 사연을 듣게 되었다. 아직 희망은 충분히 있기에 습관적유산의 원인과 치료에 대해 설명을 드렸고 치료를 위한 검사예약을 해놓은 뒤 필리핀으로 다시 돌아가셨다.

그리고 얼마 후 검사당일. 잦은 이동으로 조금은 피곤해보였지만 아기에 대한 희망으로 약간 들뜬 얼굴로 그 분이 내원하셨다. 그리곤 약 한 달간의 검사를 끝내고 남편의 사업 때문에 다시 필리핀으로 귀국하며, 혹시 필리핀을 방문하시게 되면 꼭 연락을 달라고 하시며 다음 예약 날 뵙자고 하고 떠나셨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레 필리핀에 방문할 일이 생겨 필리핀으로 가게 되었다. 분명 연락을 따로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필자가 묶는 호텔로 그 부부가 찾아오셨다.

우리는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식사 후 자연스레 부인의 검사 결과에 대한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부인이 항 갑상선 항체가 있어 면역치료를 임신기간에 지속적으로 해야 하므로 만약 임신을 하게 되면 한국으로 와서 출산 때까지 조심하며 치료와 관리를 계속해야한다고 말씀드리니, 잠시 정적이 흐른 후 남편이 부인과 오랜 시간 떨어져있는 것이 가슴 아프셨던지 눈물을 보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셨다.

그리고 다음날. 전날 부부가 가이드 하시겠다던 약속이 있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약속장소로 나갔지만 그 부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부인분이 찾아와 남편분과 밤새 싸우셨다고 하시며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사과를 하시며 눈물을 보이셨다. 힘들어하시는 그분들의 상황에 나도 마음이 답답했다.

부인께 위로를 해드리고 다음날 무거운 발걸음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그 뒤로도 그 분은 3차례나 더 자연유산을 하게 되었는데, 한 번은 현지의사로부터 자궁내막암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어 놀란 마음에 한국으로 급히 귀국하여 나를 찾아오셨다. 검사결과는 자궁내막암이 아닌 자연유산을 잘 못 판단한 것이었다. 그 후 부부는 결심을 굳히셨는지, 아기를 생각하며 나를 믿고 따라와 주겠노라 하였다. 그리곤 어느 날 마침내 또 임신이 확인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바로 귀국해 내원하라고 전해드렸고 부인은 바로 귀국해 유산방지 치료를 시작 할 수 있었다.

내원 당시에도 임신수치가 많이 떨어져 유산 직전의 상태였다.

그러나 치료가 시작되면서 아기는 정상적으로 성장하며 각종 검사와 치료를 잘 이겨내었고, 부인 분도 틈틈이 필리핀에 있는 남편에게도 다녀올 수 있을 정도로 양호한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10개월이 흘러 부인은 제왕절개로 건강한 아기를 출산 할 수 있게 되었다. 3년 고생 끝에 만난 소중한 아이였다.

그리고 퇴원하는 날.

아기를 안은 아빠와 산모의 표정은 세상의 행복을 다 안은 듯 행복해 보였다.

아빠는 1년 전의 절망적이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서툰 한국말로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더 이상의 찬사가 없을 정도로...

그리고 2년 뒤. 부부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둘째를 임신하였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부부는 또 10개월을 필리핀과 한국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고 무사히 둘째아기를 분만하게 되었다.

오랜 고생 끝에 낳았던 첫째는 벌써 훌쩍 커서 건강한 모습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재롱을 부렸다. 그 가족을 보며 참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부부가 일찌감치 유산으로 인해 아기 낳은 것을 포기하였다면 지금 저 아이의 재롱을 볼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부부의 의지가 두 아이에게 세상의 빛을 알게 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벌써 세월이 꽤 흘렀다.

가끔 진료를 하다가 이렇듯 벚꽃이 날리는 걸보면 필리핀에서 힘들어하던 부부의 모습이 생각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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