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문턱에서]

   

 김미진
 불문학 박사
 부산대 강사

몸 속 꼭지가 고장 났는지 볼 때마다 눈물이 고인다. 듣고 있으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땅이 꺼지게 한숨이 나오고,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비겁한 생각도 든다. 피어나기 시작한 꽃봉오리 같은 아이들이 어처구니없이 목숨을 잃었다. 단 하나라도 정상적으로 버티어줬다면 6천 톤이 넘는 배가 그렇게 그들을 물속으로 데려가 버리지는 않았을 텐데. 물론 어른의 죽음이 아이들의 죽음보다 가볍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더 많이 산 우리가 그 아이들을 지켜줘야 했다. 유치원 때부터 부모, 선생님은 물론, 어른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을 아이들이다. 배가 기우는데도 아이들이 1시간 넘게 공포와 불안 속에서 제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을 그 아이들은 왜 그렇게 따랐던 것일까? 배를 책임지고 있는 이들의 말이었기 때문에 불안해하면서도 그 말에 복종했던 것이리라. 어떻게든 살고 싶은 생명의 강한 본능마저도 주저앉혀버린 그 말은 결국 따를 필요도, 따라서는 안 되는 말이었는데 말이다. 그 순간 그들은 믿을 수 없는 그 말을 굳게 믿었을 것이다, 아니 믿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른의 말이라고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님을, 능력 닿는 한, 세밀히 따져 따를지, 따르지 않을지 생각하고 판단하는 힘을,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는 자세를 우리는 아이들에게 가르쳤어야 했다. 그러나 말귀를 알아들을 즈음부터 우리는 아이들에게 질문보다는 이해를 주문했으며, 비판적 사고보다는 암기를 강요했다. 생각, 토론, 비판을 통해 주관을 키워가는 교육은 중학교 입학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대학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말 잘 듣는 아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그만 입으로 세상을 향해 왜라고 쉴 새 없이 질문을 해대던 아이를 신통하게 바라보는 것은 초등학교까지다. 흐뭇한 웃음을 짓게 만드는 그 순수함과 천진함의 상징인 질문은 사회부적응과 반항의 표시로 재해석된다. 더더욱 권위를 갖춘 어른의 말은 의심해서도, 불신해서도, 위반해서도 안 되는 것으로 가르친다. 그런 아이들이 자기보다 못한 어른들의 말을 믿고, 그 말에 기대어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착한 아이로 기르기 위해 그들에게 나름의 사고와 판단력을 키워나갈 기회를 빼앗아왔다. 하나만이 정답이고 나머지는 다 오답인 문제를 내어 진리가 하나임을 은연중에 가르쳐왔으며, 정작 생각이라는 것이 세월과 함께 조각보처럼 하나하나 수고스럽지만 스스로 만들고, 이어 붙여가며 완성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지 못했다. 그 어느 나라 아이들보다 착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이제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서로의 다양함을 뽐내며 서로 풍요로워질 수 있는 생각의 스펙트럼을 가지지 않는다. ‘너무’도 착한, 너무도 닮은 아이들이 되어버렸다. 맹목적 불신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들이 피곤해질지 모르지만 아이들에게 질문의 권리와 질문의 여유를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 이 땅에 갈릴레이나 콜럼버스처럼, 단단한 껍질을 깨는 인물이 더 나올 수 있도록 그 바탕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어른들부터 그릇되고 부당한 권위의 말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해야 한다. 생각하지 않고 덥석 믿어버린 많은 말에 대해 아이들이 진지하게 질문할 때, 공부나 해,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돼라고 말하는 무능력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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