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경
시인

행복한 결말의 동화는 우리에게 희망을 품게 해 준다. 어린 시절 읽은 동화 중에는 슬픈 결말로 끝나는 이야기들이 더러 있었다. 가슴 한켠이 알싸해지는 슬픈 결말이 때론 행복한 결말보다 더 오래 여운을 남길 때도 있지만 로버트 브라우닝이 쓴 동화 <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의 결말처럼 참혹한 충격을 준 것도 있었다.

하멜른의 골칫거리 쥐떼와, 골칫거리 쥐떼를 없애기 위해 피리 부는 사나이의 힘을 빌리는 어른들, 그리고 쥐떼를 없애주었던 피리 부는 사나이가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얼개를 완성하는 순간, 그 놀라운 반전은 섬뜩함마저 주었다. 동화 속 어른들은 지켜야 할 원칙과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조금도 지혜롭지 못했다. 그래서 이야기는 참척의 비극으로 끝이 났다.

지난 4월, 우리나라에도 당연히 지켜야 할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어른들이 불러들인 피리 부는 사나이가 다녀갔는지 모른다. 인천을 출발하여 진도 앞바다 맹골수도를 건너던 수백 명의 어린 생명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쥐떼처럼 창궐하는 부조리와 부도덕을 스스로 찾아내고 미리 몰아내지 못한 어른들의 어리석은 잘못으로 인하여 채 피어 보지도 못한 어린 생명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올봄은 유난히 철도 없이 봄꽃들이 서둘러 피었다가 지더니 봄꽃보다 아름다운 아이들이 이렇게 안타깝고 황망하게 지고 말았다. 중심을 잃고 차가운 바다 속으로 침몰해버린 세월호의 밑바닥에는 대한민국이 지키지 못한 허울뿐인 약속과 원칙들이 켜켜이 쌓여 있을 것이다.

사고 직후 팽목항을 다녀온 지인에게서 사고가 난 후에도 여전히 주체가 없이 무질서와 혼란이 계속되고 있는 암담한 상황을 전해 들었다. 엄청난 비극을 앞에 두고 아직도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 쥐떼들만 우글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수라장이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비극을 수습하는 주체가 없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참으로 절망적이었다. 비극적인 동화가 현실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누가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불러들여 기어이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황망한 비극을 안겨 주었는가. 우리는 최선을 다해 우리가 불 수 있는 피리를 구해보기는 한 것인가. 왜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수많은 쥐떼들을 퇴치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피리를 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가. 아이들은 우리가 지켜야하는 우리의 미래다. 미래가 사라진 오늘은 죽은 시간일 뿐이다. 죽은 시간을 살면서 다시 행복을 꿈 꿀 수 있겠는가. 걷잡을 수 없는 자책들이 쏟아지는 동안에도 끝내 우리는 단 1명의 생존자도 더 구해내지 못하고 침묵하는 바다만 바라보며 참담하게 이 봄을 견디고 있다.

팽목항에도 5월은 왔다. 오늘도 스스로 행목항을 찾은 사람들이 캄캄한 절망의 물길 속에서 다시 희망을 건져 올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생업까지 미루고 달려온 자원봉사자들, 각계각층의 따뜻한 지원과 보살핌, 사소한 유류품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바다를 뒤지는 진도의 어부들, 목숨을 건 잠수부들의 희생, 전 국민적 애도의 마음들이 하나가 되어 희망을 건져 올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세월호의 매뉴얼은 조각조각 찢어졌지만 진정한 봉사의 매뉴얼을 조용히 지켜나가는 봉사자들이 있어서, 급박한 침몰의 위기 속에서도 끝까지 침착했던 승무원들과 교사들, 그리고 용감했던 단원고의 아이들이 있어서, 우리는 아직 행복한 결말의 동화를 꿈꿀 수 있다.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무원칙의 구태를 벗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주체로 거듭나야 함을 뜨겁게 공감하는 순간이다. 조금도 지체할 수 없는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서 있다.

푸른 5월이다. 참담한 자책의 시간은 잠시 접어두고 다시 행복한 동화를 완성하는 꿈을 꾸어 본다.

다시 쓰는 동화는 반드시 행복한 결말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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