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천(吐天) 장이랑의 동양학 산책]

   
▲ 토천(吐天) 장종원

조선은 양란 이후 의승군 활동을 통해 불교계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사찰의 중창불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17세기 중반 이래 18세기까지 사찰의 중창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현존하는 대부분의 큰 사찰들은 이 때 그 원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중심 전각의 복원이 이루어졌고, 숙종대와 영ㆍ정조대를 거치면서 2차 중창 사업이 벌어졌다. 법당의 재건과 함께 불상 및 불화조성도 크게 증가하였고 야외 법회에 사용되는 대규모 괘불도 많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불사에는 왕실 등 유력자의 후원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 후기에도 왕실은 불교를 보호하는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다. 왕실의 위패를 모시는 사찰에는 특별한 우대 조치가 취해졌고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왕실 여성들의 시주도 적극적이었다. 특히 정조는 부친인 사도세자를 위해 용주사를 창건하고 세자의 탄생에 대한 감사로 석왕사에 비문을 내리고 토지를 기부하는 등 불교에 개인적 관심을 가졌다. 안정된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고 지방 관료나 양반들의 침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사찰들은 왕실과 유력 가문들의 위패를 봉안하는 원찰이 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이러한 연결을 금지시키기 위하여 사찰에 위패를 봉안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왕실이나 유력 가문의 후원을 얻지 못한 일반 사찰들은 안정된 경제적 기반을 갖지 못했다. 이들은 부과된 공납을 마련하고 경제적 생존을 위해서 종이나 미투리를 만들고 농업에도 종사했다.

임란과 호란으로 인한 국가재정의 피폐가 그대로 사원경제로 이어져 간 것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사원은 경제적 궁핍에 시달려야 했는데, 여기에 더하여 사원들은 지방 관리들의 가렴주구의 대상이 됨으로써 궁핍의 도는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각 사원의 승려들이 스스로 사원의 극심한 곤궁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자립적인 경제의 기반을 구축하고자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다.

어려워진 사원경제의 타개방안으로 강구된 승려들의 활동이라 하지만, 제약받는 신분조건 등으로 그 범위가 그리 넓지는 못하였다. 예측 되는대로 상품의 생산과 판매가 고작이지만 그마저 발견되는 구체적인 사례는 매우 드문 편이다. 그중에 평강 부석사의 미투리 산업을 들 수 있다. 승려들이 자체 수급을 위해 삼아오던 미투리를 대량 상품생산으로까지 발전시켜 사원경제에 기여하고 있는 경우이다. 이 밖에는 진상품 및 공납관물을 생산하던 전국의 적지 않은 사원들의 예를 살펴볼 수 있다. 정기적으로 각종 산채와 과일, 청밀 등 주로 사원의 특산물을 진상해 온 사원에서는 이를 사원의 부업으로 발전시켰을 가능성이 없지 않으며, 특히 국가 여러 기관에 공납하기 위한 승려들의 제지 작업은 고갈된 사원경제를 일으키는데 작게나마 일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활동들이 사원의 궁핍해결에 약간의 도움은 되었지만 사원경제의 개선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따라서 자립경제의 기반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사원 및 승려들의 경제적 활동 노력을 다시 살펴볼 때 크게 관심을 끄는 것은 사원의 다양한 계 조직들이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승려들의 갑계가 주목된다.

특히 16세기 말부터 시작된 승려들의 계(契) 조직은 사찰을 유지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17세기 이후에 승려들은 개인 전답 등 사유 재산을 소유하였고, 보사청(補寺廳)을 설치하여 사찰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려고 노력하였다. 승려들은 공물생산과 채광, 각종 공예생산에 품팔이를 하기도 하였다. 19세기에는 수취체제가 문란해지면서 사찰에 대한 공납과 과세도 과도하게 요구되어 심각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승려들은 군역과 산성 축조뿐 아니라 산릉이나 제언 축조에도 부역군으로 동원되었다. 이처럼 과도한 승역(僧役)은 사찰 몰락의 주요한 원인으로 대두되었고, 나라에서도 부역을 경감시켜 주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법통의 내용은 ‘간화선 우위의 선교겸수’를 지향한 휴정의 사상 및 수행체계와도 부합하였다. 법통의 성립은 법맥을 공유하는 계파와 문파의 형성과 맞물려 돌아갔고, 문파별로 근거 사찰, 활동 지역이 정해지고 사제 간의 법맥 전수와 경제적 상속이 동시에 가능해졌다. 즉 출가와 득도, 전법뿐 아니라 사찰 및 재정 기반의 계승도 법맥으로 연계된 사제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법맥과 법통을 매개로 한 문파와 근거 사찰의 성립, 사유 재산의 상속은 조선 후기 불교의 존립과 교단 안정화에 중요한 물적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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