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스 칼럼]

   
▲ 공기화
   부산교육대 명예교수
 

가마솥과 같이 생겼다는 부산은 산들이 바다를 감고 길게 뻗은 도시이다. 지리적으로 산과 산 사이에 마을이 있어 이들이 서로 교류를 하려면 고개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고개는 다리 못지않게 지역과 지역을 연결해 준다.

낙동강과 바다로 연결된 강서구에는 녹산과 산양 사이의 옛 마성이 있었던 ‘성고개’, 송정과 용원 사이에 허 황후가 넘어왔다는 ‘송정고개’가 있다.

금정구는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고개들이 많다. 회동수원지의 주민들이 철마 구곡천으로 가서 ‘야시고개’를 넘어 기찰을 거쳐 동래온천장으로 갔다. 철마에서 동래 쪽으로 가는 데에는 회동 동편에 아홉산 뒤에 있는 ‘개좌고개’가 있는데, 서홍인이라는 자성대의 수자리 군졸로 그가 잠들었을 때 충성된 그의 집에 키우던 누렁이가 쓰러진 주인을 오륜대의 물을 적셔 깨워 살렸다는 전설이 있는 고개이다. 기타 부곡동과 서동을 잇는 오시게고개라고 했던 ‘서동고개’, 화정마을에서 양산 쪽으로 하여 서울로 가는 ‘화정고개’ 등이 있다.

남구의 대표적 고개는 ‘대연고개’이다. 남구, 수영구, 해운대 방면의 사람들이 부산진시장을 가기 위하여 넘던 고개이다. 해방 후 한국전쟁 때 1차 착평공사를 하였고, 1968년에 도로확장과 2차 착평공사를 하여 낮아졌다. 이 고개는 문현동에서는 ‘문현고개’, ‘지개골고개’라고 하고 대연동 쪽에서는 ‘대연고개’, ‘신정(신동)고개’라고 한다. 그밖에 감만동의 ‘솔개고개’, 용호동의 ‘백운고개’와 ‘큰고개’, 용당동에서 용호동으로 넘어갔던 ‘뻘끼이고개’가 있고, 우암동의 ‘장고개’, 문현동에 ‘문고개’ 등이 있다.

동구에는 범일4동과 범천2동 간에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넘어 ‘아리랑고개’라고 하였던 ‘성북고개’가 있다. 동구 산동네에 고갯길이 아닌 곳이 없지만, 수정3동에서 가야동의 동의대학교로 넘던 곳은 예부터 감나무가 많아 ‘감고개’라고 하였다.

동래구에 동래에서 구포장으로 가던 높고 긴 ‘만덕고개’. 수운으로 구포와 덕천에 물건이 쌓이면 이 고개를 통해 동래읍으로 들어왔다. 지금은 두 개의 터널이 있어 많은 자동차들이 왕래하고 있다. 온천장에서 서동 쪽으로 가는 ‘시시골고개’도 유명하다.

부산진구에는 양정의 신좌수영에서 전포동 쪽으로 넘어가는 지금의 송상현 공의 동상이 있는 곳이 해발 50m 정도의 ‘모너머고개’인데, 마비현(馬飛峴) 또는 마비치(馬飛峙)라고도 하였다. 이곳은 황령산과 금정산맥의 화지산 쪽으로 숲이 울창하여 연결되었는데 맹수들과 왜관에 밀무역을 하는 짐을 노리거나 주민들의 짐을 빼앗는 도둑떼가 설쳐 날이 저물고서는 넘기가 어려워 ‘못넘는 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부산-동래 간의 경편철도(경편철도)를 부설하면서 고개가 깎여 평지처럼 되었다. 초읍 성지곡수원지 서북 쪽에 있는 ‘불태고개’는 등산객의 쉼터로 많이 이용된다. 서쪽으로 불응령(불태령), 북으로는 만덕동, 북동으로 금정산과 갈라지는 갈림길이다. 성지곡수원지를 따라 500m 정도 올라가면 오른쪽이 ‘불태고개’이며 왼쪽이 ‘제게너머고개’인데 백양산 주등산로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북구는 금정산과 접하고 있어 가장 고갯길이 많은 곳이다. 동래와 구포를 잇는 ‘만덕고개’의 옛 지명은 기비현(其比峴)이며, 초읍과 만덕으로 넘던 고개를 ‘불태령(佛態嶺)’ 또는 ‘부태고개’로 부른다. 만덕에 올라서면 부처님이 보인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일명 질매재라고 하는 ‘말등고개(양산치兩山峙)’는 구포의 주지봉과 영산이 연결된 곳인데 구포와 덕천을 잇는 말등과 같이 생긴 고개이다. 산성사람들이 구포장을 갈 때 마사로 된 산이 있는데 호랑이가 꼬리로 모래를 날려 빠르게 넘던 고갯길이라 하여 ‘모리재’라고 하였다. 문리재(門里峙, 일명 물래재)는 두 고갯길이 있는데, 금곡의 공창마을에서 금정산성 아문으로 오르는 ‘금곡 문리재’와 화명동 대천리 마을에서 금정산성 관행로로 말을 타고 넘던 ‘화명문리재’였다고 한다. 기타 ‘동원고개’, ‘의성고개’, ‘밤나무고개’, ‘숫돌고개’, ‘어부랑고개’, ‘야시고개’, ‘비석골고개’ 등이 있었다.

사상구에는 엄광산과 구덕산 사이에 있는 학장동의 ‘구덕고개’가 있다. 이 고개를 구덕령(九德嶺), 구덕기재, 구덕재라고 하며 구덕터널이 뚫리기 전에 대신동에서 학장, 구포로 하여 양산, 밀양, 김해로 가려는 사람들이 넘던 고개이다. 또 하나의 고개를 들자면 ‘냉정고개’인데, 부산진구 개금동과 사상구의 주례동을 경계로 하는 고개이다. 이 고개에 차가운 물이 솟는다고 하여 냉정이라는 지명을 가지게 되었다.

사하구 ‘대티고개(재첩고개)’는 괴정과 서대신동을 넘던 고개이다. 이 고개의 괴정 쪽 기슭에 부산의 분뇨를 버리는 탱크가 1960년대까지 있었다. 괴정 신촌에서 대신동을 넘을 때 소나무가 많아 ‘솔티(松峙)’라고 하였다. 봉화산에서 몰운대로 빠지는 긴 산록이 있는데, 다대동의 홍치마을과 아미동 사이를 잇는 ‘홍치고개’가 있고, 괴정4동에서 신평1동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배고개(이현梨峴)’인데 바다의 배나 먹는 배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구평동의 독지장을 보러 왕래했던 고개이다. 아마 붉은 고개인 붉고개에서 전음된 것이라 유추되고 있다. 장림에서 다대로 넘어가는 ‘다대고개’는 높지 않으나 장승배기 또는 ‘오목고개’라고 했다. 감천 태극도 촌과 아미동 비석마을을 잇는 곳을 ‘반달고개’ 또는 ‘아미고개’라고 한다.

서구 ‘까치고개’는 토성동 부산의대병원에서 비석마을로 올라가는 고개로서 무덤이 있어 잿밥음식들을 먹던 까치가 많이 서식하여 ‘까치고개’라고 했다. ‘대티고개(대치고개)’는 서대신동과 괴정동을 잇는 길로 1930년대까지 하단에서 부산포로 넘어가던 유일한 길이었다.

수영구는 바다를 길게 접하고 있어 고개가 거의 없다. 고려시대에 귀양 와서 정과정(망미2동 4-7일원) 모래톱에서 오이를 키웠던 정서(鄭敍)를 오옹이 오옹건니나룻터에 건네주면 집으로 올라갔던 고개가 ‘용머리내미고개’ 또는 ‘용두갑’이라 했다.

연제구에는 토곡의 ‘톳고개’와 연산동, 망미동과 수영동을 연결하는 ‘망미고개’가 있다.

영도구에 예부터 알려진 고갯길은 ‘아리랑고개’가 있다. 1930년대만 하더라도 이 고개는 동삼동과 신선동을 잇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동삼동에서 잡힌 생선을 이고 부산장에 걸어가 팔았는데 이 고개의 도둑에게 많이 당했다고 한다. 지금은 봉래동 금화사를 지나 청학동으로 가는 큰길을 ‘아리랑고개’라고 한다.

중구 ‘영선고개’는 부산에서 최초의 근대학교인 봉래초등학교와 영주시장에서 중앙동을 거쳐 대청동 쪽 인쇄골목으로 내려오는 길이다. 이 길은 동래부사가 초량왜관까지 말을 타고 행차를 했던 곳이었다. 이 길은 중앙동, 초량동 앞의 바다를 매립하기 전에 초량에서 부산의 도심으로 오는 유일한 길이어서 짐을 이고서 이 고개를 넘던 여인들의 비녀나 반지를 빼앗은 도둑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회자되었던 고갯길이다.

해운대구 ‘섧은고개’는 간비오봉 기슭에서 못안마을로 통하는 고개인데 기장, 송정, 해운대 딸을 부산이나 동래로 시집을 보내면 이곳까지 따라와 섧게 울며 이별하였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옛 고갯길 중에 좌동에서 기장 백동으로 넘어가는 ‘우태고개’가 있는데 옛날에 도적떼들이 소를 훔쳐가 이 고개에서 해체하였다고 한다. 1980년대에 생긴 ‘달맞이고개’는 해운대에서 송정으로 가는 고갯길인데 지금은 카페, 미술 갤러리 등이 들어선 예술의 거리로 부산의 관광명소 중 하나이다.

울고 넘던 부산의 고갯길은 착평하여 낮아져 거의 평지와 같은 도로가 되었지만 1세기 전만 해도 길이 가파르고 숲이 우거져 산짐승이 출몰하여 무척 힘들었다. 고갯길은 교통의 불편으로 아이들은 마을 간에 편싸움을 했고, 누나는 재를 울고 시집을 갔던 애환들이 있었던 곳이다. 우리 인생의 고갯길도 무서워 말고 아리랑 노래라도 부르며 힘차게 헤쳐 나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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