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자
군대를 이끌고 적지에 깊이 들어가서 갑자기 적병과 마주쳤을 때 적병은 매우 수가 많고 용맹스러우며, 용감한 전차대와 사납고 날쌘 기마대가 아군의 좌우를 둘러싸고 있어 우리의 전군이 두려워하여 도주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때 태공은 어떤 전술을 구사해야 하는지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이렇게 겁내어 도주하는 군대를 패병이라고 한다. 여기서 대처하는 책략을 잘 세우는 장수는 승리할 수도 있으나 대책을 잘 세우지 못하는 자는 패망할 것이다.

아군의 유능한 군사와 강한 쇠뇌 부대를 매복시키고 날쌔고 용감한 전차대와 기병대를 좌우익에 배치한다. 항상 그들은 아군의 본대에서 앞이나 뒤로 삼 리 떨어진 곳에 있게 하였다가 적병이 아군을 추격하여 오면 우리의 기마대와 전차대를 내놓아 적의 좌우를 돌격하게 한다. 이렇게 하면 적병은 혼란하여지고 아군의 도주하는 자도 저절로 그칠 것이다.

적병이 우리의 전차대와 기마대들과 맞부딪치게 되었을 때에 적병은 많고 아군은 적으며, 적은 강하고 아군은 약하며 적의 공격하는 진형은 잘 정돈되었으며 정예하여 우리의 진세가 맞설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태공은 설명한다. 아군의 재능 있는 군사와 강한 쇠뇌를 가진 군사들을 좌우에 복병시키고 전차대와 기마대가 견고하게 진을 치고 대기하다가 적병이 우리의 복병을 지나치면 강력하고 많은 쇠뇌가 그들의 좌우에서 발사시키고 전차대와 기마대의 정예한 군사들이 급속하게 공격하게 하여 그들의 전면을 치거나 그들의 후미를 친다면 적병이 제아무리 많더라도 적의 장수는 반드시 패주할 것이다. 이러한 전략을 잘 구사하였던 장수가 바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던 김유신이다.

신라의 삼국 통일은 한민족과 한국사에 일대 비약의 초석이고 시작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며 그 의의를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신라의 삼국 통일은 최초의 민족 통일을 실현한 것이었다. 백제·고구려 사람들을 흡수함으로써 한국 민족의 원형이 이때 와서야 비로소 형성되었고, 또 한국사도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로서 기술하게 되었다. 둘째, 민족 통일 국가의 자주적인 쟁취이다. 나당 연합군이 체결된 동기는 서로 달랐다. 신라는 생존권의 확보와 삼국의 통일에 있었지만 당나라는 위협적인 숙적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아가 한반도를 속방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당태종은 김춘추에게 평양 이남과 백제의 땅은 신라에게 준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660년 백제를 정복하고 웅진도독부를 설치했으며, 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통치했다. 따라서 신라는 17년간 당군과 50여 회에 걸쳐 혈전을 벌여야 했으며, 특히 당군 20여만 명을 매초성 전투에서 격파하고 또 금강 하구의 해전에서 승리하여 서해상의 지배권을 획득함으로써 당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하였다. 그리하여 민족 통일 국가를 창설했고, 또한 문화적·민족적 단일성을 성취하는 초석을 마련하였다. 셋째, 민족 문화의 융합·토착화 및 찬란한 발전을 가져왔던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보다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신라는 한민족의 고유한 전통을 유지·발전시켜왔기 때문에 신라의 삼국 통일은 보다 순수한 민족 문화의 줄기를 형성할 수 있었고, 전통적인 문화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민족 문화를 발전시켜 오늘날까지 계승될 수 있었다. 이것은 한족을 지배했던 거란족과 여진족이 그들의 문화를 상실하여, 마침내 민족 자체의 소멸을 가져온 사실에 비추어볼 때 더욱 돋보인다고 하겠다.

이러한 신라의 삼국 통일에 주도적 역할을 한 최고의 공로자가 바로 김유신이었다.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어 공격하는 전술에 능했다. 629년 8월에 신라군은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했는데 고구려 군사에게 역습을 당하여 사태가 불리해지면서 죽은 자가 많았다. 그러자 병사들은 사기가 꺾여 싸울 생각이 없었다. 김유신도 이때 부친과 함께 출전하고 있었는데 그는 부친 앞에 나아가 투구를 벗고 말했다. “우리 군사가 패하였습니다. 제가 평생 충효를 행하면서 살기로 기약했으니 싸움에 임하여 용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들은 즉, 옷깃을 들면 갖옷이 바로 되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 하니 제가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그는 곧 말에 올라 칼을 빼어 들고 참호를 뛰어넘어 적진을 넘나들며 적의 허점을 공격하여 적장의 머리를 베어서 들고 돌아왔다. 신라 군사들이 이것을 보고 사기가 올라 적을 공격해서 5천여 명을 죽이고 1천여 명을 사로잡으니 성에 남아 있던 적군들은 크게 두려워하여 감히 항거하지 못하고 모두 항복했다. 이때부터 김유신의 용맹은 널리 알려져 그의 지위는 굳건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밖에서는 현명하고 지혜로우며 용감한 장수로서 탁월한 용병술을 구사했을 뿐 아니라 안으로는 재상으로서 올바른 정치를 실시한 위인이었다. 대부분의 영웅은 말로가 비극적이지만 상대의 허점을 적절히 이용하여 역사적 민족 통일의 성업을 성취하고, 살아 남아서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으며 또한 천수를 향유했다는 점에서 인간이 바라는 이상적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저작권자 © NBN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