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마음따라]

   
 

가을이면 안부가 궁금해지는 풍경들이 많다. 특히 담양이 그렇다. 담양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풍경이 하늘을 찌를 듯 높고도 우람한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길이다. 하지만 이 거대한 가로수들도 사실은 30년이 좀 넘은 수령에 불과하고, 가로수의 한 자락을 물고 이어지는 관방제림이 진짜 담양의 나무들이다. 관방제림을 끼고 흐르는 담양천이 해마다 홍수로 넘쳐나 주변의 가옥과 농작물에 피해를 입혔기에 인조임금 당시의 담양부사가 관아의 노비들을 동원해 제방을 쌓고 그 제방을 튼튼하게 유지하기 위해 심은 나무들이 지금의 관방제림(官防堤林)이다. 함양의 상림도 그렇지만 예로부터 이 나라에는 치산치수를 잘 하는 지혜로운 목민관이 많았다.

2~300년 이상은 족히 묵어 보이는 오래된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둑방길을 걸어가노라면 한 자리에서 오랜 시간 보고 겪었던 나무들의 비밀스런 이야기들이 줄줄이 풀어져 나올 것만 같다. 그야말로 오래 사는 나무들의 박물관이다. 팽나무, 느티나무, 푸조나무, 서어나무, 100년 이상은 살기가 어렵다는 벚나무도 몇 그루 보인다. 밑둥의 둘레가 네 사람은 손을 잡아야 될 것 같은 거대한 나무에서부터 여인네의 몸매를 연상시키는 나무랑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한 나무에 이르기까지 모양도 크기도 다양한 나무들이 끝없이 서 있는 길은 사계절 모두 걷는 맛이 있지만, 단풍 드는 가을날이 아무래도 제일 깊은 맛이 난다.

오래 묵은 생명들에게는 뭔가 신성한 기운이 스며들어 있다. 굳이 정령신앙(精靈信仰)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묵묵히 몇 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나무들에게서는 범접할 수 없는 기운과 표현하기 어려운 묵은 향기가 느껴진다. 거인국에 온 걸리버처럼 나무에 붙어 귀를 붙여보면, 아련하게 생명을 이어온 나무들의 숨소리도 들리고 깊고도 진한 체취도 느껴진다. 꿈결 같은 길을 걷다가 지치면 벤치에 앉아 쉬면서, 가방에 넣어온 차 한 잔 마시노라면 황홀한 운치가 눈물 찔끔 나게 만든다.

무등산 북쪽 산자락에 위치한 소쇄원 또한 사계절이 모두 정취가 뛰어나지만, 계곡과 뜨락에 자욱하게 깔린 낙엽을 사박사박 밟으며 걷는 흥취가 제일이지 싶다. 하지만 소쇄(瀟灑)함의 극치를 느끼게 하는 것은 한겨울 눈 덮인 풍경임을 인정한다. 소쇄원(瀟灑園)은 일본식 정원(庭園)이 아니라 우리나라 토속적 뜨락인 원림(園林)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이다.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는 스승인 조광조가 기묘사화 때 유배당했다가 결국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낙향하여, 평생에 걸쳐 손수 소쇄원을 조성했고 임종 때, 자손들에게 두 가지 유언을 남기게 된다. 절대로 팔지 말라는 것과 돌 하나 계곡 한 구석 손길 발길 닿지 않은 곳이 없으니 하나도 상함이 없게 할 것을 당부했으나, 두 번째 당부는 긴 시간 전란을 거치고 보수공사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지켜지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자연적 산자락을 개인의 사유지로 만들면서도 천의무봉(天衣無縫)한 모습으로 인공의 건축물을 들여앉힌 전체적 모습은 참으로 이 나라 원림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조화롭다.

입구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제일 먼저 친밀하게 안겨오는 초가 정자 ‘대봉대’에 걸터앉아 소쇄원의 전체 전경을 천천히 두루 살핀 다음, 맨 위쪽에 놓인 터진 담장 - 개울을 가로지르며 놓인 돌다리 담장을 만나는 순간에는 볼 때마다 탄성을 지른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인공미의 절묘함이 이보다 탁월한 것이 있을까!

   
 강영미
 작가·전 외국어고등학교 교사

가장 양지바른 언덕 위에 사랑채와 서재를 겸한 제월당이 소쇄원의 주건물이고, 돌아내려오면 계곡 한가운데쯤 지어진 단칸 정자 광풍각이 자리하는 이 모든 배치들이 완벽하게 자연스럽다. 계곡을 낀 야산에 조성된 1,400평의 원림을 거닐며 깊어가는 가을날, 소쇄원을 찬양한 당대 명문장가들의 시 한 구절 읊어보는 시간 속으로 묵은 가을 향기가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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