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천(吐天) 장종원선생의 동양학 산책]

   
  토천(吐天) 장종원선생

불교가 정착되면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재의 국토가 오랜 과거부터 불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현재도 불교의 호법신들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상이 불국토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은 특히 불교의 수용과 국가체제의 정비를 동시에 이루었던 신라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이는 국가의 정통성을 불교적으로 수식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현재의 국토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불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유연(有緣)국토 관념의 예로서는, 신라의 수도 경주에는 먼 옛날 과거 부처의 시대에 사찰이 있었던 일곱 곳의 가람 터가 있다는 이야기와 황룡사의 뒤쪽에 있는 큰 돌이 과거 부처인 가섭불이 앉아 있던 연좌석(宴坐石)이라는 이야기 등이 있다. 이러한 관념은 이 세계는 수많은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여 왔으며 그 때마다 부처가 출현하여 중생들을 구제하였다는 불교의 세계관에 의거하고 있는 것으로, 신라는 현생에서의 불교 수용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아주 먼 과거에 불교와 인연이 있는 불교의 중심국가라는 의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 신라가 불법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관념과 관련된 것으로는 신라의 국왕이 전생에 도리천 천자의 자식으로 하늘의 천중들이 보호하고 있고,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주변의 나라들을 모두 복속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이러한 관념은 중국에 유학하였던 승려들을 통하여 제시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안홍이 저술했다는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들어 있었다고 하며, 선덕여왕 대에 활동한 자장 역시 비슷한 내용을 이야기 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중국에서 불교 신앙을 통하여 사회의 안정을 추구하려 했던 수나라 문제의 정책이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불법의 가호로 나라를 평안하게 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 부처의 사리를 봉인한 대형 탑들을 건축하였던 숭불의 황제로 유명했는데, 그로 인해 후대에는 문제가 도리천의 보호로 남북조의 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인식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그 당시 신라는 삼국의 항쟁과정에서 상당한 어려움에 처해 있었으므로, 이러한 문제의 숭불정책을 본보기로 삼아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려던 과정에서 신라도 불법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인식이 생겨났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 불교가 도입된 것은 고구려나 백제와 거의 동시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불교의 공인에 있어서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초래하는 등 어려움을 겪은 원인은 첫째 신라의 왕권이 확립되지 못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법흥왕 이전까지의 신라 왕권은 사실상 육촌장(六村長)을 중심으로 한 씨족적 민간세력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따라서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볼 때 불교를 수용하는 주체세력이 없었기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둘째는 민속신앙(民俗信仰)과의 갈등을 들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불교를 반대하는 이유로서 ‘어린아이 같은 머리를 하고 이상한 복장을 하며(童頭異服), 고래(古來)의 믿음과 위배되기 때문’이라는 언급이 있다. 즉, 샤머니즘적 원시신앙이 불교수용에 장애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는 신라사회의 폐쇄성으로 위치가 반도의 남쪽에 있다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하여 당시 내륙의 문화첨단이라 할 수 있는 불교의 수용에 적극적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527년(법흥왕 14) 불교가 공인된 뒤, 그것이 국교(國敎)로서 정착하기까지 신라불교는 필연적으로 남다른 우여곡절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라불교가 당면한 근원적 과제는 불교가 외래종교가 아니라 우리의 고유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신념의 제시였다. 나아가서 이 신라라는 땅이 본래 불국토(佛國土)였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불국토사상은 급기야는 불교를 우리의 종교라고 하는 주장으로 발전되었고, 그것은 신라불교의 토착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명산의 봉우리마다에 불보살(佛菩薩)의 명호(名號)가 붙여지고, 그곳에 사찰을 건립하게 된 것 등도 모두 신라인 특유의 산악숭배가 불교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한 현상이다. 고신앙(古信仰)이 산을 숭배하고 돌을 중요시할 때, 불교도 또한 같은 입장에 섬으로써 불교는 서서히 신라의 정신적 지주로서 그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초기 불국토사상의 선봉이 된 것은 자장(慈藏)을 비롯한 구법승(求法僧)들이었다. 그들은 특히 고유한 산악숭배를 불교적으로 윤색하는 사상적 의의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다음 단계로는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을 비롯한 뛰어난 사상가들에 의해 도입된 불국토관(佛國土觀)이다. 이것은 이 땅을 불국토로 믿음과 동시에, 그렇지 못한 현실을 불국토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사상성을 지니게 하였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들은 불교가 신라땅에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는 전위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즉, 이 땅이 본래 불국토였다는 신념을 신라인들에게 불어넣음으로써, 자부심을 갖고 불교에 귀의하게끔 하는 중요한 정지작업의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국명 자체에까지 불교성지의 이름을 써서 실라벌(實羅伐)이라고 표기하여 서라벌의 어원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토천 장종원은 동양명리학자이자 경영학 박사로서 토천 행복연구원장으로 활동.

▲ 전 동의대학교 강사

▲ 원광디지털대학교 평생교육원 강사

▲ 부경대학교 평생교육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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