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업이 만난 문화지킴이들] - (17) 서양화가 박윤성

   
요즈음 고향에서 운반해온 향나무를 다듬고 새기는 일로 회화작업을 대신하면서 속 깊이 불타오르는 정열을 다스리고 있다.

당리동 사거리 그의 화실은 유회구 냄새와 나무결의 은은한 향으로 가득 찼다. 캔버스 앞에서 목조각대 앞으로 옮겨 앉은 박윤성 씨가 최근 옮겨온 향나무를 조각도와 끌로 새기고 파내는 작업에 몰입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작품진열대 위에도 완성했거나 제작 중인 목조각품들로 가득 차 있다. 요즘 나무결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졌다. 끌 가는대로 두들기고 쪼아내면서 유화작업으로 피로해진 눈을 쉰다.

화가라기 보다 차라리 자유롭고 싶어 그림그린다는 박윤성(朴倫性, 1951년 생) 씨 어릴 적부터 눈이 시리도록 보아 온, 아버지가 만든 소목(小木, 나무로 만든 가구따위)에 입힌 옻칠 또는 붉은 색깔(엄밀히 말하면 주황색)의 강렬한 매력을 잊지 못해 이를 재현하고 있다. 더러는 주술적인 의미로 부적과 원시적인 냄새도 풍기기에 민화에서 그 해법을 찾기도 한다. 터실터실 단순화시킨 화면전체에 깔려 있는 원초적 느낌의 붉은 빛깔은 크레파스로 꾹꾹 문질러 놓은 유치원생 그림을 연상케도 한다.

박윤성은 경남 진주 토박이로 조부(박길용)‐아버지(朴道和)‐동생(朴倫基) 3대에 걸쳐 전승해 오고 있는 백골장(白骨匠, 칠하지 않는 목기와 가구) 집안의 장남이다. 특히 아버지가 만든 8모나 12모로 각이진 개다리소반은 솜씨가 가장 빼어나서 백골은 통영 등으로 보내어져 옻칠을 입혀 팔려 나간다. 한때 박씨네의 백골장롱 솜씨에 감탄한 서울 인사동 상인들은 이를 대량으로 주문 구입하여 서울 칠공방에서 고급 칠을 하고 장석을 달아 고가품으로 팔았었다. 진주중을 졸업하고 막내 삼촌의 권유로 부산 경남고로 진하였기에 집안 공방일에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눈만 뜨면 망치·대패·끌·톱소리를 듣고 자랐고 어머니가 백골 위에 입히는 옻칠작업을 지켜보며 살았기에 육순이 넘은 지금에도 문득 들려오는 환청과 칠냄새를 느낄 때가 있단다.

요즈음은 소반을 찾는 이도 장롱을 찾는 이도 없어 부친 사후 일손을 놓은 상태이지만 아버지의 손을 거쳐 손끝에서 완성되는 공예품에 대한 궁금증이 컸던 만큼, 미적감각이 뛰어난 눈썰미로 아버지의 ‘붉은 색’을 읽어내었고 이를 캔버스에 담아 내었다.

72년 부산교대를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부임한 후 본격적으로 그림그리기에 들어갔다. 헌책방골목을 다니며 구입한 일본 미술잡지 「미술수첩」 등에 수록된 그림들을 보고 습작의 힘을 길렀다. 단색으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힘 있어 보였다. 그리고 푸른색을 즐겨썼다. 「촉석루」, 「남강유등」 등을 즐겨 그렸다. 이른바 70년대 초의 ‘푸른색시대’다. 80년에 이르면 화면은 주황색으로 옷을 갈아 입는다. 유년의 강력한 느낌이 옻칠색으로 나타났다. 황토색 보다 짙은 주술적인 냄새도 풍겼다. 마치 주사(朱砂)로 부적을 그리듯 그렸다고 수근 그렸다. 서양물감으로 우리 냄새를 풍기고 싶은 화가의 단순한 마음의 표현이었는데.

하늘 별자리를 소재로 한 「하늘」 연작은 민화적인 요소가 결집된 작품이기에 더욱 그런 느낌이 강하였으리라. 80년 후반이면 백두산과 금강산을 답사해온 느낌으로 북한산을 그리는 등 간결하면서도 대범, 단순한 해학의 서정성 짙은 회화미의 선으로 나타난다. 위장된 가면을 벗어버린 원초적인 표현으로서 알갱이(뼈대)만 화면에 가득찼다.

이즈음 교대 선배 김영주 씨 권유로 당시 동아대 미술과 김종식 교수를 만난다. 준비해간 그림을 본 선생의 “단색으로 그린 것은 데생이지 그림이 아니야”란 충격적인 혹평을 듣지만 이후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로 선생과 가까와진다. 74년 노랑 바탕에 붉은 점과 선으로 그린 「서장대」는 선생과의 교감을 이끌어 내었고 그림그리는 방법과 전시장들의 그림얘기를 나누며 밤이 맞도록 술잔을 비워댄다. 그림이 좀 맘에 들면 “박군 술많이 묵었능가베”, 마음에 차지 않으면 “어이 박군 술많이 먹어야겠네” 작업성과를 술에 비견하면서 사제의 정을 두터이 했다. 평소 주촌에서 만난 스승은 언제나 수첩 꺼내어 스토로그(선긋기) 작업을 하고 있으면서 그림에 대한 집착을 키워왔다. 박윤성은 그런 스승의 모습을 닮고 싶었다. 그런 한편 술 취한 스승을 껴안고 대청동 계단길을 올라 집에 이르면 대문을 가로막고 선 사모의 호된 소리를 들어야 했다. 사모의 역정은 제자들이 앉은 술좌석을 엎을 정도여서 으례 그려려니 넘기고 말 일이었다.

자기 그림 속에 빠져 버린 박 화백은 학교 근무할 때도 짜투리 방을 작업실로 꾸미고 쉬는 시간, 점심시간이면 붙박혔다. 어떤 때는 조·종례 시간도 모르고 작업하다가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래서 방해받지 않고 마냥 그림만 그리고 싶었다.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71년 첫 발령받은 신선초등학교를 시작으로 20여년 몸담은 교직을 떠나야 했다.

1992년 전업작가를 선언하고 명퇴했다.

그러나 준비없이 시작한 자유는 대책없는 자신을 옥죄어 오기만 했다. 그렇게 2년을 시골(진해 웅동)에 칩거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본 부인(천영희)의 도움으로 부산에 와서 집 가까이에 작업실을 마련하게 되었고 안정을 되찾아 눈만 뜨면 작업실에 달려갔다.

97년 5월의 서울 도울아트타운에서 전시한 「박윤성, 우리의 자연과 문화전」은 박윤성의 자유분방하고 싶은 내면의 세계가 짙은 주황색으로 나타났다. 경주 남산에서 만난 마애불을 굵고 거친 선으로 그려냈다. 부처도 뭉텅그린 선 하나로 함축하였다. 꿈틀 거리는 선 속에서 부처가 살아났다. 그리고 영취산·승학산·천황산·화왕산 등을 그렸다. 그는 자연을 품에 안고 작업한다. 이 시기에 함께 선보인 목판화도 이색적이었다. 다듬지 않은 나무판 속에 하늘을 새기고 바다를 그려 넣고 풍경을 새겨 예의 붉은 색으로 찍어 내었다. 2003년 6월의 「금강산그리기전」에서는 화가의 기운과 욕망이 송곳처럼 날이 섰다. 화면전체에 흐르는 붉은 기운이 사위스럽기까지 하다(서울 가나아트센터).

2012년 꽃상여 타고 소천(召天)한 아버지의 애잔한 모습을 그린 「아버지전」(2013, 해운대 몽마르트갤러리)은 오히려 처절하리만큼 생략된 선의 유희였다. 차라기 “미친 놈 거기 그림이가” 내뱉던 아버지의 노기띤 호통이 그리워지는 화가의 절박한 내면세계의 표현이었다.

어느 날 진주 본가에서 버려진 나무들을 주어와 깎고 다듬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칼가는 솜씨며 나무결 보는 눈 등 나무 다루는 일이야 백골장 부친의 등 너머에서 배우고 익혀 몸에 벤 일이 아니던가.

익숙한 솜씨로 한 작품 뚝딱 완성하기도 했다. 나무결 따라 새기다 보면 문득 그림속의 선 위에 옷을 입히는 느낌이 들기도 했으리라.

2대째 이어오던 가업을 동생에게 떠넘기고 건축공부를 해보리라 부산으로 유학왔었지만, 삼촌의 권유로 교육대학에 진학하면서 어릴 때부터 즐겨하던 그림공부로 목표를 정한다. 학생들 가르치는 틈틈이 그림을 그렸지만 그림으로 향한 욕구는 불 같아서 결국 퇴직하고 전업화가의 길을 택하였다. 자유스러워지면 그림그리는 재미밖에 없으리라 생각했으나, 갈등의 연속이었고 이를 극복한 지금은 개성 있는 중견화가로 입지도 분명해졌다.

박 화백의 하루 일과는 이른 새벽 2시 경 눈뜨면 작업실로 출근하여 다른 사람들 출근시간까지 작업한다. 그에게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황금시간이다. 라면도 끓일 줄 모르던 박 화백이 요즘 술 안주도 곧잘 장만한다. 막걸리 한 잔에 풍성한 그림얘기들로 작업실이 만당한다.

   
 주경업
 부산민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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