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을 만나다] - (29) 김길녀 시인

◆ 바다의 본적에서 바다를 쓰다

지난 해, 적도로 긴 휴가를 떠났던 바다의 시인 김길녀가 돌아왔다. 일만 칠 천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세계 최대 군도의 나라, 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조화를 이루는 나라,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서 두 번의 봄을 보내고 돌아온 시인을, 그가 그리워하던 부산 바다가 통유리 창으로 보이는 모지포 작업실에서 만났다.

   
  김길녀 시인

- 어떤 계기로 인도네시아로 떠나게 되었는지요? 그리고 떠날 때의 마음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중간 마음이었습니다. 고국에 있어도 좋고 이국에 가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인니로 떠나던 해, 봄은 제게 많은 의미가 있는 시절의 시작점이었거든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요. 남편의 해외 파견 근무에 따른 이동이었고, 전업 백수인 제가 이곳에 남아 있을 뚜렷한 명분이 없었거든요.

- 시인으로서 인도네시아로 떠날 때의 마음과 인도네시아에서 만난 시인 김길녀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오랫동안 준비한 제3시집 출간을 앞두고 있었어요. 출국일에 맞추어 발간을 서둘렀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인쇄 과정에 떠나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나오는 시집이라 아쉬움이 컸습니다. 그 해 5월쯤에 자카르타에서 시집을 받았어요. 자카르타 도착 3일 만에 환영식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때 말랑말랑한 감옥살이를 하러 왔다고 했더니,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웃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오랫동안 이국을 떠돌며 산 사람들이 격하게 공감하는 분위기였던 것 같기도 했고요.

인니 생활은 둘만의 시간이자 혼자만의 시간이라 할까요? 온전히 나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살짝 흥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결혼과 함께 인간 김길녀라는 존재는 잠시, 아니 24년이란 긴 세월 동안 어느 한 장소에 방치해 두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살던 곳이 28층이었는데, 서재 창문을 통해 오래된 공원을 볼 수 있었어요. 숙제처럼 미루었던 음악에 빠지고, 갈피갈피 접어둔 곳이 더 많은 책을 읽고, 공원에 즐비한 늙은 나무들의 지붕을 보면서, 꿈꾸던 감옥에서 시인 김길녀의 자유를 맘껏 가졌습니다. 그동안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가시의 존재가 나를 감싸고 있었음도 느낄 수 있었지요. 이곳에 두고 간 나를 멀리서 제대로 들여다보았다고 할까요.

- 인도네시아는 어떤 나라인지 간략하게 소개해 주십시오.

인도네시아는 적도를 중심으로 인도양과 태평양 사이에 있습니다. 연 3모작이 가능하여 세계적인 쌀 생산지로 꼽히지요. 총인구는 2억 5천 만 명으로 중국, 인도, 미국에 이어 세계 4위의 인구 대국입니다. 수도는 자카르타이고 날씨는 평균 낮 기온이 32도이고 건기와 우기로 나누어집니다. 루왁커피로 대표되는 커피의 나라이며 300여 종족이 583종에 달하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또한 종교의 나라답게 무신론자가 거의 없습니다.

- 인도네시아의 한인 사회. 문화 예술을 중심으로 소개도 부탁합니다.

한인들이 처음 정착하게 된 계기는, 태평양 전쟁 당신 일본군 징용으로 왔다가 귀국하지 않은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격적인 한인 진출은 1968년 시작된 기업 진출이라고 합니다. 올해로 수교 41주년이죠. 지금은 2,200여 진출 기업이 있고, 약 5만 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한인들을 대하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태도는 매우 호의적입니다. 최근 불고 있는 한류와 더불어 한국인과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습니다. 수도 자카르타를 중심으로 한국 문화를 알리는 곳이 많습니다. 대사관 소속의 한국문화원. 한,인니 문화연구원, 인도네시안 헤리티지 코리안 섹션, 한국문예총(한인 문인협회, 미술협회, 음악협회 월화차협회 등)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섬마다 한인들이 있는 곳은 문화 단체들이 있습니다. 저도 그곳 한인 문인협회에 소속되어 시화전과 책 발간 등의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 인도네시아는 만 칠 천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로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볼거리와 먹거리 등, 여행 할 곳이 많을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는 여행지가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여러 섬을 여행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처음과 끝 여행지가 기억에 가장 남습니다. 첫 여행지로 선택한 곳은 수마트라섬입니다. 수마트라 호랑이로 대표되는 인니에서 가장 큰 섬입니다. 호랑이가 산다는 국립공원을 두 곳이나 넘어 세계의 윈드서핑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다는 끄루이 비치까지 아무 사건(?) 없이 다녀왔어요. 여행 후에 들으니, 인니에서 20년 이상을 산 사람도 엄두를 못내는 열악한 조건의 여행을 그야말로 용감한 인니 생활 초보자들이 해냈더군요.(웃음)

또 인상에 남는 곳은 귀국을 앞두고 떠났던 마지막 여행지인 술라웨시섬, 따나 또라자입니다. 자카르타에서 2시간 비행 후 육로를 통하여 8시간이 소요되는 깊은 산속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먼저 보았던 곳이죠. 오래전 독특한 장례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며, 늘 바다를 찾아 떠돌던 저를 보이지 않는 손길이 이끌었다는 필연을 강요하고 싶은 곳입니다. 배의 모양으로 지어진 지붕인 똥꼬난으로 지금도 여전히 세계인들의 관심을 끄는 곳이지요. 이 두 섬 외에도 고유의 빛깔로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섬들이 지천에 널려 있는 곳이 인도네시아입니다.

- 이번에는 김길녀시인의 제 3시집 <푸른 징조>(애지,2013)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죠. 작년에 시집 출간 과정에 인도네시아로 떠나서 국내에 있는 독자들에게는 시집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시집을 소개한 몇 몇 매체의 기사를 보면, 긴 투병생활에 대한 시편들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시집에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들을 듣고 싶습니다.

앞에서 밝혔듯이 개인적으로 의미가 많은 2013년에 대한 이야기부터 풀어 볼게요. 저는 11년 전 유방암 진단을 받았어요. 작년이 투병 10년째 되던 해였죠. 생물학적 나이의 한 세대를 시작하는 해이기도 했고요. 꿈꾸던 감옥살이를 하게 된 것도 의미 있는 시간이었네요. 이런 저런 이유로 제게는 가장 의미 있는 시집의 출간이었지요. 처음엔 저의 병을 숨기고 싶었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알아지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편해지기 시작했어요. 불편했던 사람들의 시선이 편해지니, 제 마음 속의 소용돌이도 침잠하면서 아픔을 드러내는 작업과 병에 대한 기록을 풀어내고 싶은 자연스러운 의무감 같은 것도 생기더군요. 그렇게 투병에 관한 기록들이 시 속에 스며든 것 같습니다. 지금도 병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시인이 아닌 환자로서의 고통은 생각보다 커지요.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지 글을 쓰는 작업으로 기꺼이 고통과 놀 수 있는 행운이 있어서, 잃는 것만큼 얻는 것도 있다는 것에 위안을 안고 살아집니다.(웃음)

- 인도네시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어떤 활동 계획을 갖고 있는지요?

인니를 떠나면서 스스로에게 약속한 두 가지가 있었어요. 그 나라를 여행 하면서 느낀 점과 풍경 사진을 담은 산문집과 제 4시집을 준비해 오자는 주문이었지요. 다행히 그 약속은 잘 지켜질 것 같습니다. 한인들의 인니 정착 70년을 정리하는 ‘한인 70년사’ 편찬위원회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사 뉴스 전문 매체인 데일리 인도네시아에 저의 여행기 ‘김길녀 시인이 만난 인도네시아’를 연재하기로 하였습니다. 인터뷰에서 미처 풀어내지 못한 여행기는 연재를 통해서 하게 될 것 같습니다.

- 인도네시아에 머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간단히 소개해 주십시오.

대사관부인회에서 주관한 인도네시아 국립대학교 한국어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어수업 봉사활동에 참여한 일이었습니다. 한국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는 학생들의 관심이 커서 인기가 매우 높았습니다. 다른 대학에도 한국어 학과가 생기지만 그에 비해 수업을 할 선생님은 많이 모자란다고 했습니다. 한국어의 인기 덕분에 봉사활동의 보람도 컸습니다. 그 인연으로 알게 된 학생들과 지금도 한국어로 가끔 안부를 주고받고, 인도네시아 시 번역에도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 끝으로 한국에 돌아온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십 대부터 늦가을 여행을 즐겼습니다. 지금이 마침 늦가을이여서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네요. 바다가 아닌 산골짜기로 늦가을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그동안 생각나던 음식들도 맘껏 먹고 싶고요. 지금, 바로 자갈치 시장으로 가서 싱싱한 해산물과 자갈치 아지매들의 싱싱한 웃음을 만나고 싶습니다.

김길녀 시인 약력
-강원도 삼척 출생. 1990년 <시와 비평>등단.
시집으로 ‘푸른 징조’,‘바다에게 의탁하다’,‘ 키 작은 나무의 변명’ 등이 있다.
제13회 한국해양문학상(시)을 수상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긴 휴가를 보내고 최근에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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