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시간의 신도림역 풍경이다. 수많은 전동차들이 일정한 규칙 아래 얽히고 설켜 오간다. 사람들은 신문 한장 펼칠 여유 없는 공간에서 출근차를 기다린다. 짜증도 나겠지만 한편으론 북적대는 사람사는 맛을 느낄 수 있다. 한때 이곳에는 '푸시맨'이라는 별종의 사람들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전동차가 정차하고 문이 열리면 종잇장 구겨 넣듯, 전동차 문이 닫히는 그 순간까지 온 몸으로 승객을 밀어 넣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요즘엔 '커트맨'이 있다. 푸시맨과 달리 마구잡이로 타려는 승객을 적당한 선에서 막는다. 승객의 안전과 질서를 위해 승차인원을 통제한다. 같은 지하철 역사, 같은 업무에 종사하지만 그들의 임무는 수년만에 바뀌었다. 한때는 일분일초가 아까운 출근객을 위해 '쑤셔넣기'식 인력 수송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몇년 지나지 않아 방향을 바꾸었다. 푸시맨의 역할이 안전사고와 운행지연의 주범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지하철에는 지난 세월과 현재의 세상이 있다. 푸시맨은 개발지향적 밀어붙이기의 상징과도 같다. 개발과 성장을 위해 인권과 불편, 과도한 실례 등을 모두 양해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무리한 성장에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상쾌해야 할 출근길부터 짐짝 취급 받다보니 기분 좋을 리 없다. 몇 분의 조기 출근이 하루의 생산성을 갉아먹는다면, 이 또한 과학적인 접근법은 아니다. 목소리 높여 질서를 외치는 정부가 한편으론 승객을 짐짝 취급하는 행태를 한결같이 이해할 국민은 없다. 지하철도 변하는 세태를 무시하지 못하는 듯하다.

지하철 풍속의 변화와 사회가 별반 다르지 않다. 기성세대는 경제개발의 깃발 아래 웬만한 푸시를 '푸시'로 여기지 않고 살았다. 국민이 재산인 나라에서 경제 발전의 주체보다는 도구로 활용된 점이 더 많았다. 먹고 살만한 이즈음, '더 이상의 푸시는 안 된다'고 커트를 주장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커진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 바람에 정권이 교체되기도 했고 국민의 권리도 향상됐다. 우여곡절도 겪었지만 결국 푸시 후에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커트가 이루어졌다.

유독 현 정권은 과거로 되돌아간 듯하다. 밀어붙이기식 건설경기 부양에서부터 무모한 환율 정책, IT 무시발언에 이르기까지 정권의 주변에는 온통 푸시맨 뿐이다. 누구하나 나서 만류(커트)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강력한 실권에 주눅들린 것인지, 오히려 한술 더 뜨는 모습들 뿐이다.

초나라 항우를 물리친 유방은 진시황제와 같은 영화를 누리고 싶어했다. 그러자 번쾌와 장량은 한목소리로 "아직은 천하를 통일하기 전 입니다. 이제 시작인데 향락에 빠지면 진시황제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습니다"고 간(諫)했다. 조선시대 왕들도 삼사(三司) 중에서도 사간원의 간언을 귀담아 들었다. 역사를 볼 때 바른 위정자 곁에 누군가는 충언역이(忠言逆耳) 역할을 했다. 이들이 커트맨이다.

지금은 커트맨은 없고 푸시맨만 있는 시대가 됐다. 푸시맨들은 책임지지 못하는 말로 국민들에게 상처를 준다. 말로써 상처를 준 정권의 말로(末路)는 비참하다. 데인 상처처럼 흉터가 남아 잘 지워지지 않는다. "기자실에 다시는 뽑지 못할 대못을 박겠다"며 언론에 대못질을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처지를 보면 너무나 명확하다. 지금 커트하지 않으면 언제가는 '그 말'이 족쇄가 되어 그의 발목을 채울 것이다. 그래서 그의 곁에 진정한 커트맨이 필요하다.

이경우부장 kw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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