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경
 시인
 

바라미는 순하디 순한 귀를 가졌다. 예전처럼 잘 듣지 못해도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오롯이 세운 두 귀 속에 그득한 진심은 여전하다. 누군가에게 제대로 귀 기울이지 못하는 내가 가장 부끄러움을 느끼는 부분이다.

바라미가 내게 보내는 최고의 기쁨을 표현하는 것은 똥이다. 강아지 때 배변 습관을 가르치느라 정해진 자리에 똥을 누면 넘치게 칭찬을 했었다. 지금도 똥을 누고 쏜살같이 달려와 춤을 추듯 기쁨을 표현할 때마다 똥 앞에서 역겨운 표정을 지을 수가 없다. 바라미에게 똥은 기쁨과 동의어다.

밀란 쿤테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도 스탈린의 아들인 이아코프와 똥에 대한 일화가 나온다. 스탈린의 아들이었던 아아코프는 전쟁포로가 된 후 수용소의 공동변소에 배설한 똥을 치우지 않았다. 이아코프는 똥을 치우는 문제로 언쟁을 벌이다 결국 고압전기가 흐르는 철조망에 붙어 숨을 거둔다. 똥 때문에 목숨까지 잃은 이아코프의 생각과 행동을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아코프의 이해받을 수 없는 행동에는 그만의 어떤 메시지가 있었을 것이다. 이아코프가 똥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통할 수 있었다면 그의 결말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극과 극은 통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라미의 나이를 사람의 나이로 환산해보면 거의 구순에 가까운 노인이다. 고령의 반려견을 바라보며 어느 날 문득 내게도 까마득하던 저녁이 오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생로병사는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야멸친 순리이다. 그 법칙은 참 냉엄하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몸속에 각인된 유전자의 흐름에 따라 병들고 죽어가게 되어 있다. 죽어야 다시 태어나고 더 진화한다. 죽음은 유전자가 개체를 보존하고 진화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대부분의 생명을 가진 것들은 타고난 유전자대로 따르면서 살고 죽어 가지만 인간만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늙지 않고 오래 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어쩌면 인간에게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이 노화인지 모른다.

법구비유경에 절세미인 렝게에게 물질의 허상을 깨닫게 해준 부처님의 이야기가 나온다. 렝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아름다운 여인으로 렝게 앞에 나타난 부처님은 영원할 것 같던 아름다운 몸이 순식간에 백발이 되고 죽고 썩어 구더기가 나오고 백골이 되어가는 모습을 순식간에 렝게에게 보여준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원해도 얻지 못하는 것, 청년이나 장년은 반드시 늙는다는 것, 아무리 건강한 자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 형제자매가 모여 즐기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헤어질 때가 돌아온다는 것, 아무리 부자라도 그 부귀는 언젠가 그의 곁을 떠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 것이다.

바라미에게 불성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바라미의 모습에서 모든 생명의 생로병사를 자연스럽게 깨닫는다. 어느새 나보다 더 늙어버린 바라미를 보며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바라미는 내게는 선지식 같다.

바라미는 이제 우리를 위해 옛날처럼 재롱을 부리지 않는다. 조그만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을 보이던 청력도 시들해져 불러도 못 들을 때가 많다. 눈동자는 흐릿해져 자꾸 어디엔가 부딪히기도 한다. 깔끔하던 배변 습관도 허술함을 자주 보인다. 무엇보다도 잠이 많아지고 무기력하다. 그런 모습 속에 나의 모습이 있다. 어쩔 수 없이 동병상련을 느낀다.

사월이면 부처님 오신 뜨락에 환하게 연등을 밝힌다. 연등 아래 서서 나는 여전히 보이지 않고 볼 수 없는 캄캄한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캄캄함 속에서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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