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스 칼럼]

   

 김행범
 부산대 행정학과 교수
 

800년 전인 1215년 6월 15일, 영국 국왕(John)의 폭정에 맞선 귀족과 시민은 결국 들판에서 왕으로 하여금 대헌장(Magna Carta)에 서명하게 만든다. 국왕도 법 절차를 따른다는 사항에 서명하는 대가로 귀족들도 왕에게 충성을 계속한다는 협약이었다. 이는 영미법계의 보통법(common law)의 초석이며 불문이든 성문이든 헌법은 개인은 물론 국가마저 따라야 하는 규칙이 되었다. 개인을 처벌하는 각종 형법 또한 결국 헌법 아래서 만들어지며 형법을 위반하면 엄히 처벌된다. 어느 형법 규정이 헌법을 위반한 경우 최고법인 헌법은 그 법규를 무력하게 만든다. 법과 정치의 근본에 존재하는 최고 규범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폭정과 폭력에서 해방된 것인가?

그러나 헌법 자체의 위반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감각하다. 예산심의의 헌법상 시한은 12월 2일 밤 12시이다. 수 십 년 동안 정치인들은 이를 당연히 무시해오고 있다. 폭력을 처벌하는 형법 및 정치관련법 개정 과정에는 국회의원들의 회의장 점거, 의원들 간 난장판, 시설 파괴 등의 폭력이 개입되어 있다. 여당에 유리한 표결을 진행할 것으로 예상되는 국회의장을 저지하는 방법은? 아침 일찍 수 십 명의 반대당 의원들이 ‘아침 인사하러 왔다’는 명분으로 의장의 공관을 기습 방문하여 안방 한 가운데 의장을 세워두고 빙 둘러서서, 콩나물시루처럼 방을 꽉 채워버리는 것이다. 의장에게 시종 징그러운 웃음과 농을 건네면서 말이다. 뒤늦게 경호원들이 달려와도 방 안에 몸을 들이밀 여지도 없고, 그 과정에서 경호원들이 의원들을 약간 다치게 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도 의원들의 전략이기 때문에 경위들도 속수무책이다.

뇌(腦) 세포는 신체의 모든 감각을 인지하며 우리가 손을 다쳤을 때의 통증도 이 뇌의 인지 작용이다. 그러나 정작 뇌 자체에 대해서는 감각이 없기 때문에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헌법이 가진 특성이 그러하다. 그러고도 정치인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수퍼 갑(甲)’이다. 사법부가 이를 바로 잡을 수 있을까? 천만에. 웬만한 무리한 행위가 아니면 대개 입법에 수반된 ‘정치 행위’로 규정하고는 발을 빼면 그만이다.

정치인이 정치 과정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폭언, 우겨쌈, 억지, 몸싸움은 어떤 선진화법으로도 다 막지 못한다. 개인은 그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법을 순종하라고 강요받는다. 최루탄, 전기 톱, 분뇨, 몸싸움과 같은 하드웨어 폭력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다. 더 진화한 폭력은 황색 언론 및 SNS를 동원한 각종의 까발리기식 공격으로 그 가족과 후보자를 생매장하는 소프트웨어 폭력이다. 물론 이 경우 그것은 이름과는 정반대로 부드럽기는커녕 가장 악랄하고 거친 공격이다. 군중들이 거기에서 고함치는 ‘좌-우’의 정확인 의미가 얼마나 정확히 이해되어 있는지 의문스럽다. 그 진영 논리에 따라 이 사회의 최고 정치수준에서 오가는 폭력을 보면서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면서도 또 닮아간다. 얼마 후 우리 모두는 인민재판 마당의 완장 찬 군중이 되어 있다.

사적 영역에서의 개인 간의 폭력은 각종 법으로 규제된다. 이에 비해 정치가 보여주는 폭력은 아무런 제어도 받지 않은 채 민주주의, 정치과정, 여론정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제어 불능의 폭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 모든 진정한 폭력의 무한하고도 종국적인 생산자는 바로 ‘정치’이다. 문명의 지표는 모든 폭력이 아니라 바로 이 정치폭력의 양과 질에 달려 있다.

사회의 모든 부분을 관장하는 정치라는 작용은 이 사회를 무정부의 야만 상태와 국가에 의해 질서 지워진 상태를 구분 짓는 척도이다. 그러나 정작 법과 정치의 근본규범인 헌정 질서 자체가 이토록 폭력에 무력하며, 정치과정이 오히려 폭력의 원산지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모든 기성 정치판을 뒤엎는 새로운 마그나 카르타를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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