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행범 
 부산대학교 교수

규모를 불문하고 모든 기업, 대학, 정부 조직에는 지도자(리더)가 있다. 리더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선천적인 자질이 중요하다는 이론(자질론), 개인의 특성보다는 상황이 중요하다는 이론(상황론), 리더측만이 아니라 팔로워 간의 상호작용이 중요하다는 시각(추종자 중심론) 등이 있다. 리더의 능력은 세인들의 믿음처럼 리더의 ‘말’로 평가되는 게 아니다. 현존 질서의 날카로운 비판적인 자들이 곧 문제해결자들인 것도 아니다. 온갖 거대 추상명사들을 흩날리며 허장성세를 보이던 자들이 막상 그 책임질 위치에 들어서서 어떻게 일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리더가 아닐 때에는 자신이 조직의 적임자라고 허풍을 치다가 막상 자리에 앉혀 놓고 보니 역사와 전통을 나름대로 쌓아온 조직을 일거에 꼴찌로 망쳐 놓고는 자신은 연금명세표만 챙겨들고 도주하기도 한다.

대학에 있다 보니 오늘날 사회 도처에 파급된 성과주의에 잡혀 대학교수가 자신의 옹졸한 이익 목록에 골몰하여 정작 조직 전체가 몰락에 직면해도 아랑곳 않는 경우도 있다. 대학교수가 본분을 잃고 지방 유지들과 나누는 꼬릿한 오뎅을 탐닉하다 자신의 학과를 망쳐놓는 꼴도 보았다. 그러다 자신의 무능이 들통 나면 리더 직위를 슬그머니 내려놓고는 집으로 가서 자신의 자잘한 성과점수 목록이나 챙기겠단다. 그런 자가 악인인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악의 초보적 이분법을 넘어 좋은 리더감이 되는가의 여부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악한 자는 리더가 될 여지도 있다. 그러나 책임성과 비전이 영세한 자는 양순한 팔로워는 될지언정 리더는 될 수 없다. 세월호 선장이 젖은 지폐를 꺼내어 말리는 장면에서 우리가 한탄하며 읽어내는 것도 그러한 리더 자질의 영세함이다. 영남 지방의 속어인 ‘쪼다십’과 리더십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남북 전쟁을 통해 미국을 하나로 다시 만든 지도자였지만 곧 암살되고 말았다. 리더의 상실에 직면한 미국민의 위기감과 슬픔으로 만든 비가(悲歌)가 휘트먼(Walt Whitman)의 “O Captain! My Captain!”이다. 그러나 이 봄 진도 바다에서 우리는 그와는 다른 또 다른 선장에 대한 절망의 시로 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오 캡틴! 나의 캡틴! 우리의 두려운 여행은 끝이 났소/ 배는 고통을 다 겪었으며, 당신이 찾던 탈출은 이루어졌소/ 항구는 멀고, 종소린 들리지 않으며, 이제 물 밑 사람들은 고요할 뿐/ 진도 앞 바다의 뒤집힌 용골을 바라볼 때에/ 이 특별한 부활절 아침, 부활절 인사말도 잊은 채/ 바다는 깊이 신음하고 온 나라의 눈에는 눈물/

리더십의 문제는 개별 조직을 넘어 사회, 국가 전체에도 그대로 타당하다. 수많은 황당한 비명횡사의 소식을 접하며 우리는 어느새 자연사(自然死)가 행운이 되는 나라로 가고 있다. 선진국이란 환상에서 우리가 기대했던 가치는 자연수명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적어도 개처럼 죽지는 않는 나라였다. 질식된 ‘세월’이 침몰될 때 우리 모두의 무능, 허구, 위선과 비효율도 함께 가라앉았다. 정치, 관료제, 언론, 기술 .... 시스템 전체가.

오래된 유행가 ‘회전의자’는 모든 샐러리맨의 승진 혹은 부하로부터 리더의 직위로 오르고 싶어하는 욕망의 상징이었다. 우리가 틀렸었다. 비어있는 회전의자란 있을 수 없고 누구든 앉기만 하면 차지하는 줄 알았던 리더가 실상은 관리기술은 물론이고 고도의 비전을 요구하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고난도 자리임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오래된 부하와 신출내기 리더 간의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큰 것이다. 기업이든, 대학이든, 정부든 좋은 리더를 만남은 모든 사람의 축복이다. 나쁜 리더를 만남은 불운이다. 그러나 가장 진정한 의미의 위기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리더가 아예 없는 상태이다. 우리에게 리더가 있었던가? 그 자리가 비어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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