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업이 만난 문화지킴이들] - (16) 동래지신밝기 예능보유자 심지영

   
 동래지신밟기 예능보유자 심지영 선생이 지신밟기 춤을 시연하고 있다.

동래금강원의 부산민속보존회 놀이마당에서 동래지신밟기가 연희될 제면 방자(放恣)한 잡색들 중 작은 키에 춤맵시가 뛰어난 촌녀춤이 유난히 돋보인다. 어깨춤사위에 발디딤까지 뭍 시선을 압도한다.

춤인생 한 갑자를 넘긴 심지영(沈芝英, 1941년 생) 선생이다.

지난 7월에 이어 10월 마지막 날 서구 토성동 토성초등학교 앞 심지영무용학원을 찾아 선생을 만났다. 부군 사후 자녀를 키우면서 28년 간 지켜온 집이다. 3층 무용학원은 무수한 무용인재들이 다녀간 터여서 마루바닥이 반질거린다.

넓은 춤방 한 가운데에 심지영 선생이 섰다. 초록 저고리에 감색(紺色) 치마를 받쳐 입고 머리를 올려 핀으로 꽂았다. 오른속엔 하얀 수건을 들었다. 지신밟기의 촌녀 복색이다. 김영애 씨의 장구가 “덩 따닥 딱 쿵 따닥 쿵” 굿거리장단을 매긴다. 짙은색 치마저고리에 새하얀 수건이 인상적이다. 치마말기를 부여 쥔 손과 펴든 오른팔에 힘이 실리고 햐얀 버선발이 춤을 춘다. 굿거리장단에 구음이 실리자 춤꾼의 신명이 온몸을 감싸고 흐른다. 왼발 오른발이 서로 엇바뀌며 춤방을 휩쓴다. 가볍게 뛰어오르며 배기는 배김사위의 힘찬도약은 칠순 나이를 잊게 한다. 아픈허리의 통증도 그새 잊어 버렸다. 살푼 쥔 왼손의 치맛단이 속곳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면서 연풍대를 돈다. 한 소끔 춤사위가 잦아들면 태산을 어깨에 얹은 듯 다소곳이 춤은 잦아든다.

여덟아홉 살 소녀 지영은 언니따라 집 근처 무용학원까지 갔다가 언니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음악 듣다가, 문 배시시 열고 춤추는 모습 보는 것이 마냥 좋았다.

11살(초등 3년) 되던 해 어머니를 졸랐다. 춤을 배우고 싶었다. 모친의 만류도 소용 없었다. 세 살 때 밥상 펴 놓은 상 위에서 춤추다 떨어져 팔을 다쳐도 밥상 위에만 올라가던 어린아이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점도 쳐 보았단다. “그래, 니 하고 싶은대로 춤 추 보거래이” 할아버지 몰래 학원비를 챙겨주지만 3개월이 못되어 들통났다. “춤 배워서 사당년(기생) 만들라고 하나!” 노발대발 할아버지의 호통에 집마저 쫓겨났다.

어머니와 함께 집 근처 외가로 쫓겨났지만, 춤공부는 할아버지 눈을 피해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심지어 춤을 추고 싶어서 병까지 났다. 15살 때 무서운 할아버지가 별세하신 후 소녀 지영의 춤공부는 거칠게 없이 일취월장 한다. 경남중학교 뒷문 근처 김동민무용학원에서 동래권번의 춤과 소리 선생이시던 강태홍·최장술 선생에게서 배웠다. 7,80명이나 되는 제자들 맨 앞 줄에 서서 당차게 배웠다. 장구 한 개 값이 수월챦던 시절이어서 무릎장단 치면서 배웠다.

데레사여고에 진학하면서 충무동 왕자극장 뒤에 있는 박성옥무용학원으로 옮겼다. 가야금과 아쟁, 양금연주에도 뛰어난 박성옥 선생에게서 검무와 살풀이, 부채춤, 연꽃선녀춤도 배우고 심지어 가야금 만드는 법도 가르침 받는다. 학교수업 마치면 책가방 들고 학원으로 직행하여 학원에서 살다시피했다. 스승들은 그런 소녀를 미더워했고 사랑했다. 숙제도 친구에게 떠 넘기고 무용학원으로만 달려가 춤방에서 살았다.

식사 때면 스승의 밥상에서 같이 식사하면서, 어려운 살림 축 낸다고 사모께 눈총도 많이 받았지만 개의치 않고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하며 몸짓을 배웠다. 대신동운동장에서 공연 있을 때면 운동장 밖에 판자를 널브러 간이무대를 만들고 춤을 추어 보이기도 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덕성여대의 무용콩쿨에서 우수상을 받는다.

하지만 심지영의 고교시절은 브라스밴드부와 육상선수로서의 역할이 컸다. 당시만해도 네 시간 넘게 걸리는 기찻길을 무연탄 화물칸에 편승하여(경비 줄인다고) 대구에서 열리는 체육대회에 참가했던 기억이 새롭단다. 말만큼 덩치 크고 머리 두 갈레로 땋은 처녀애들과 달리기를 겨루어 3등상을 탔으나 유달리 작은 체구에 장한 일이었다고 주위의 칭송이 자자했던 일이다. 20살 때 숙명여대에 진학하지만 체육특기생 자격으로 세종대학에 편입한다. 그리고 이듬해 집안의 권유로 학업을 중단하고 결혼한다.

부군(김호용)은 사촌오빠의 친구로 7살 위의 직업군인이었다. 전역 후엔 부산제분과 서울 숙명여대 앞의 큰인쇄소 등 전국 각처에 여러 사업을 벌여 바쁘게 살았다. 춤도 잊고 살았으나 결혼 3년 차 들면서 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모든 걸 다 떨치고 춤판에서 훨훨 춤추고 싶었다. 부군에게 매달렸다. 여차하면 이혼해서라도 춤을 추어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1970년 9월 마침내 부군의 도움으로 토성동 요릿집 근처에 심지영무용학원을 개원하였다(심지영은 예명, 본명은 심옥자). 춤 공부도 하고 춤을 배우려는 이들에게 문을 활짝 열었다. 72,3년에는 이매방(승무와 살풀이 예능보유자) 선생을 모셔서 춤을 배웠다. 일주일에 두 번씩 스승의 모든 춤을 배우고 익혔다. 그렇게 15년 가까이 모시고 배웠다. 그때만 해도 이매방 선생의 방랑시절이어서 무용학원에서의 배움은 심지영의 춤인생에 큰 좌표가 된다. 그리고 서울로 달려가 한영숙(韓英淑, 1920~1989)으로부터 살풀이 등을 배우고 강선영(姜善泳, 1925년 생)에게서 태평무 등을 사사하는 등 앞서 춤공부한 분이나 훌륭한 춤선생이 있는 곳에는 어디던 달려 갔다.

대구 권명화의 살풀이로 본 기생춤과 부산 엄옥자, 김진홍의 지전춤 등에서 보았던 춤사위를 오래두고 기억한다. 그러면서 데레사여중 때 옆집 조씨 성을 가진 할머니의 “춤은 소리가 꺾이어서 한 번 받아 이을 줄 알아야 좋은 춤”이라는 충고를 잊지 않고 있다.

83년 11월 춤꾼 김온경 선생의 권고로 부산민속보존회에 입회한다. 어른들이 추는 춤에 반했다. 허투로 추는 것 같은 춤사위에서 발견되는 춤질서와 구성에 반했다. 이들과 더불어 추는 춤은 절로 신명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보존회 잽이들이 치는 변화무쌍한 동래 굿거리장단은 춤의 맵시를 더하고 흥겨움으로 어깨가 출렁이었다. 각설하고, 쇠치고 팔 하나만 들어도 춤이었다.

보존회에서의 역할은 동래학춤도 좋고 동래들놀음 춤판도 좋았으나 지신밟기의 촌녀춤이 제격이었다. 서광길‐이태진으로 이어온 각시춤인데다 선배 별세 후 빈 자리를 문장원(동래들음 전 예능보유자, 사망) 선생의 권유도 있었지만, 흥이 넘쳐나는 동네 주모처럼 격없이 추는 촌녀춤이 좋았다. 쪼를 빼는 주인마님 보다 이쁘게 보일려고 광택을 낼 필요도 없는 촌녀역할이 맘에 들었다.

11살 철없이 그저 춤이 좋아 춤만 추게 해준다면 더할게 없었던 시절 배우기 시작한 춤이 어느듯 60평생을 넘겼다. 결혼하고 잠시 춤을 떠났던 시간 외에 잠시 잠깐 춤 외에 다른 생각 해보지 않고 오직 전통춤 외길로 살아왔다. 김동민‐박성옥 스승에게서 배운 춤꼴이 이매방·한영숙·강선영 등 당대 춤꾼들을 만나면서 가꾸어지고 틀이 잡혀 부산의 여류춤꾼으로 당차졌다. 그간 숱한 공연을 하면서 외국에서도 초청되어 갔었다. 부산무용협회 지회장(1997)을 맡기도 했으며, 동래지신밟기 예능보유자로 후진양성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주경업 부산민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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