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천(吐天) 장종원의 동양학 산책

   

 토천 장종원 선생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물음을 다시 물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불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한 종교이다. 붓다는 기존의 인간관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인간의 참모습을 찾아 출가수행한 결과 깨달음을 성취했다.
그가 인간의 참모습을 찾았던 방법은 합리적이고 분석적이며 실증적이다. 자연과학과 차이가 있다면 육체의 물질적 구조를 밝혀 인간을 이해하지 않고 인간의 내면적 의식과 삶을 분석하여 인간을 이해한 점이다. 이러한 붓다의 인간 이해는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것만을 신뢰하면서도 유물주의의 한계를 느끼고 있는 현대인에게 인간 이해의 새로운 장을 마련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무아(無我)를 주장한다. 이러한 무아사상은 인간존재를 부정하는 것처럼 오해되기 쉽다. 그러나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은 인간존재의 참모습을 밝히는 것이지 결코 인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상이 아니다. 이렇게 무아는 인간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제거하고 바른 이해로 인도하는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아가 부정적 의미로 이해됨으로써 불교의 무아사상은 염세적이고 허무적인 사상으로 오해되고 있다.
자기상실과 가치전도의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참모습에 대한 바른 이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물을 볼 때 '보는 나(眼)'를 지각한다. 우리는 '보는 나'가 지각을 토대로 '자아'가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는다. 그러나 '보는 나'는 볼 때에만 나타난다.
보지 않을 때는 '보는 나'는 지각에서 사라진다. '보는 업'을 통해서 '보는 나'가 나타날 뿐 '자아'가 어디에 숨어 있다가 볼 때는 나오고, 보지 않을 때는 숨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음(陰), 즉 온(蘊)의 상속이다. 『잡아함경』에서 오온의 상속은 종자에 비유된다. 한 알의 볍씨가 인연을 만나면 그 볍씨는 사라져도 거기에서 뿌리, 줄기, 가지, 잎, 볍씨가 나오듯이 식온(識蘊)이 새로운 인연을 만나면 새로운 오온으로 상속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속에 상주불변하는 자아는 없으며, 오온의 상속은 업보의 관계에 있다.
인간은 업보의 현상이다. 우리가 육신이나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실상은 업보인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인간을 육체나 영혼과 같은 존재로 보지 않고 업으로 본다. 이러한 업설의 인간관에서 보면 인간은 업(業)이면서 보(報)이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어떤 본질을 갖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삶에 의해 형성되어 가는 과정적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곧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생사(生死)를 벗어나 열반(涅槃)을 성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생사는 생리학적인 생물의 탄생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실상은 무아와 업보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아'를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함으로써 나타난 허망인 것이다. 열반은 이러한 착각을 자각하고 업보로서의 자아, 즉 '무아'를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진실이다.
진실한 삶의 세계란 자아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의 본성을 획득한 삶이다. 현실의 위기를 극복하고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데는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인간과 자연, 자기와 타인이 함께 어울려, 하나가 되고 한마음이 되는 삶을 지향하는 불교의 인간관이 현대인에게 큰 지침이 될 것이다.

토천 장종원은 동양명리학자이자 경영학 박사로서 토천 행복연구원장으로 활동.

▲ 전 동의대학교 강사

▲ 원광디지털대학교 평생교육원 강사

▲ 부경대학교 평생교육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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